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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직설

누구의 문제인가?

opinionX 2018. 9. 13. 11:23

1987년 6월항쟁을 통해 독재라는 거대한 문제가 어느 정도 해소된 이후, 1990년대를 거치면서 각계각층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사회문제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요란함을 걷어내고 보면 사람들은 삶을 되찾기 위해, 아니 더 정확하게는 삶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리고 2000년대, 여전히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은 새로운 위기에 직면했다. 위기는 설득으로부터 왔다. 거악이 희미해지고, 삶들이 분절되고, 격차는 커져갔지만 그 모든 것이 개인적인 것으로 치부되는 시대가 왔기 때문이다. 왜 아직도 세상을 바꿔야 하고, 왜 문제들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설명해야 했다.

그리고 이때 동원되었던 방식은 문제들을 개인화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당신은 성소수자가 아니지만 당신의 친구나 가족 중 누군가는 성소수자이고 차별받고 있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당신과 상관없는 문제가 아니다. 이 설명에 숨어 있는 것은 세상의 모든 일이 연결되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인식이었다. 이는 근대 이후의 사회과학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이자, 동시에 사회적 연대에 대한 전통적인 인식의 다른 버전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방식의 설명은 원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부작용을 낳았다. 문제들은 내 문제와 네 문제로 분류되기 시작했고, 네 문제에 대한 무관심이 정형화되었다. 이해할 수 없지만 거기에 고통이 있으면 돕는다는 느슨한 인식 대신에, 내가 이해할 수 없다면 그 문제는 내 문제가 아니며 따라서 그들의 몫으로 맡겨둔다는 ‘논리적인’ 무관심이 증가했다.

그런가 하면 내 문제에 매몰되는 사람들도 증가했다. 내 문제에 목소리를 내고, 권리와 해결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이 문제는 내 문제이므로 나 아닌 다른 누군가가 끼어들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강해졌다. 내 문제 속에서 사람들은 민주주의자가 아니라 왕이 되고자 했다. 심지어 어떤 문제들은 서로 경쟁하는 것으로, 그러므로 내 문제를 위해서는 네 문제가 지워져야 한다는 주장도 점점 커져갔다.

출처:경향신문DB

이 두 가지 태도는 사회문제가 내 것 혹은 네 것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반한다. 사회문제와 파편화된 개인을 연결지어 보려던 시도가 실패하고, 오히려 사회문제 자체가 파편화된 것이다. 이것은 잘못된 시도에서 나온 결과가 아니라, 파편화의 힘이 너무나도 강력했기 때문이다. 남들 상관없이 너만 잘하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환영과 패배자들이 드리운 그림자가 사람들을 자기만의 사회로 몰아붙인 탓이다. 동지도 깃발도 사라진 곳에서, 각자도생과 사적 구제를 제외한 모든 것들은 힘을 잃었다.

오늘 사람들이 각자의 지옥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가운데, 가장 먼저 되살려야 하는 것은 잊혀진 교훈이다. 즉 세상에 온전한 ‘네 문제’는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사회적 상상력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새롭게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세상에는 온전한 ‘내 문제’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아무리 개인적인 것처럼 보여도 사회의 영향력하에 놓여 있는 것이며, 동시에 그것이 사회적 문제인 이상 내 마음대로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문제들이 여론이나 국가, 법에 의해 좌우되고 굴복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다. 우리에겐 어떤 이유로도 양보할 수 없는 문제들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 역시 궁극적으로는 사회적이어야 한다. 서로의 관심과 이해를 돕고, 연대를 구하고, 역행할 수 없는 저지선들을 점점 끌어올리면서 말이다.

민주노총의 트위터 담당자는 인천퀴어축제에서 벌어진 혐오세력의 폭력에 왜 민주노총이 관심을 갖느냐는 비난에 이렇게 답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말씀하신 ‘오지랖’을 우리는 ‘연대’라고 합니다.” 정말로 그렇다.

<최태섭 문화비평가 <잉여사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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