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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중등학교 시절에 나는 수년간 핸드볼 선수 생활을 하였는데, 여느 경우처럼 나 역시 다만 키가 크다는 이유로 거의 붙잡혀 들어간 셈이었다. 그러나 실력이 늘면서 절감하게 된 사실이지만 ‘이중점프슛’ 같은 고난도의 기술에는 정작 손아귀의 넓이가 관건이었다. 손이 작아 한 손만으로 공을 능숙하게 부릴 수 없다는 것, 어린 내게 그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산책은 내게 매우 소중한 취미 활동으로, 그 가치는 이 짧은 지면에 다 읊을 수 없을 만치 짜장 형이상학적으로도(!) 분잡하고 심오하다. 근자에 내가 독애하는 산책로의 한쪽에는 운동장만 한 연못이 있는데, 자갈밭이 물가를 넓게 끼고 있어 물수제비를 뜨기 알맞은 곳이다. 기량이란 기량은 모짝 그렇지만, 물수제비를 뜨는 데에도 몇 가지 조건을 살펴야 한다. 당연히 돌을 후리는 팔이 물과 수평을 이루도록 몸을 낮추는 게 좋다. 그리고 돌멩이를 내던질 때에는 그 돌과 수면이 대체로 15~25도 정도의 기울기를 이루도록 해서, 물과 부딪치며 뜨는(skipping) 힘이 길게 지속되도록 배려한다. 이 경우 직구(直球)처럼 던지지 말고 돌이 회전력을 얻도록 검지를 잘 놀리는 게 중요한데, 그래야만 자이로스코프의 효과를 얻어 부양력(浮揚力)이 높아지는 법이다. 이렇게 솜씨가 향상되면 돌이 커브를 이루면서 원하는 곳으로 제법 멀리 내달려가게 된다. 하지만, 내 경험에 의하면 이 모든 매뉴얼을 단숨에 능가하는 조건은 바로 그 돌멩이의 생김새다. 제아무리 좋은 솜씨를 갖추고 있어도 돌멩이의 ‘몸’이 뭉툭하거나 뾰족하거나 혹은 적당한 (몸)무게를 갖고 있지 않으면 그 솜씨는 빛이 바랜. 어떤 몸의 돌멩이를 줍는가 하는 것은 우연이지만, 바로 그 몸이라는 우연이 물수제비의 운명이 된다.

강가에 나와 물수제비 놀이 중인 사람들 _ 연합뉴스


행복한 부부나 커플이 의외로 적다는 사실은 이미 갖은 통계가 알리고 있다. 내 일가붙이나 주변만을 둘러보아도 사태는 심상치 않아 보인다. 그러니 여러 만남, 특히 혼인을 그처럼 축하해온 인류의 역사는 일종의 반어(反語)가 아닌가 하는 짐작이 설 법도 하다. 인간은 오직 상호작용의 관계 속에서만 인간이니, 그 관계의 알짬을 이루는 종류들이 고장이 잦고 속으로 썩어간다는 사실 속에는 어쩌면 묵시론적 조짐이 웅성거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톨스토이의 행위나 키에르케고르의 생각처럼, 관계의 형식과 성분을 도덕적-실존적으로 바꾸려는 것은 대체로 부질없는 짓이다. 내 작은 손이나 어떤 돌멩이의 모양처럼, 인간은, 인간의 몸은, 혹은 인간의 몸속에 새겨진 버릇과 고집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물론 박지성은 평발로 잘 뛰었고, 김두한은 작은 주먹으로도 잘 싸웠다. 그러나 범례(範例)로써 현실을 설명할 수는 없다. 역시, 어떤 몸을 지닌 누구를 만나는가 하는 것은 우연이지만, 바로 그 우연이 관계의 운명이 되고 마는 것이다.

나는 재미삼아 오랫동안 말과 입의 관계를 유심히 살펴왔다. 주로 입의 크기와 그 사람의 화법·말버릇 사이의 관계를 유추해보는 일이다. 나로선 남의 외모를 언급하는 일을 거의 터부시하기에 속생각으로 일관하였지만, 여기에도 그 나름의 이치가 있으니, 그 골자는 역시 몸이 제 운명을 스스로 이룬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전라도의 소리, 경상도의 글’이라는 대조법도 필경은 입의 모양과 얼마간 관련된다. 이것도 논의가 길어 다만 아쉬운 한마디만 짚자면, 사람의 일이 다 그런 것처럼 예외들이 사방에 어지럽긴 하지만, 입이라는 몸이 말이라는 관념의 운명이 된다는 것이다.

어떤 몸을 갖추고 태어나는 것은 당사자에게는 우연처럼 비친다. 그리고 그 우연에 얹힌 몸이 그의 운명을 예비하기도 한다. 가령 이소룡(李小龍)의 이모저모를 유심히 살피면 그는 대단한 몸의 디자이너로 드러난다. 비록 극중이긴 하지만 그가 상대한 무술 고수들의 동작은 기이하게 허술해 보이는데, 이는 다만 연출의 결과가 아니라 몸의 차이가 구조적으로 드러내는 차별성인 것이다. 이소룡이 민망한 화제라면 김연아를 떠올려도 좋다. 김연아의 실력이 그의 운명이 아니다. 그녀의 실력이 남다르게 얹히게 만든 그 남다른 몸, 외려 그 몸이 그녀의 운명인 것이다.


김영민 |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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