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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삶을 위해 싸우는 농성과 그들을 돕는 예술활동은 하나다

‘노동과 문화는 하나다’ ‘현장에서 배운다’는 말은 급진적 경향을 가진 문화활동가라면 누구나 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걸 실제로 체화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고 체화한 사람을 만나기도 쉽지 않다. 그것은 한 활동가의 문제를 넘어 문화이론가와 예술가 사이의 문제, 문화운동과 주류노동운동 사이의 문제와 중첩되어 있다. 신유아 역시 그런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생각으로 활동을 시작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런 문제를 해결한 한 사례가 되어가고 있다. 그는 말한다. ‘일단 현장으로 와보라.’

 



▲ 기타 만들지만 기타 칠 줄 모르던 콜트콜텍 노동자들
투쟁하며 밴드 만들고 공연도 하게 돼
싸움의 결론과 별개로 그들이 삶에 기쁨 갖게 되는 모습 보는 것이 좋았다

김규항 = 문화활동가로서 처음 맡았던 일이 뭐였나.

신유아 = 2005년에 문화연대에 들어가 선배 활동가들을 따라다니며 물건 나르고 음향 설치 돕고 보조 노릇을 하며 배웠다. 평택 대추리 투쟁 때 서울에서 매일 촛불문화제를 진행했는데 그게 내가 맡은 첫 번째 일이었다. 뮤지션들과 미술가들과 사회원로들을 섭외하고 조직하고 기획하고.

김규항 = 코스콤 투쟁 때 농성장을 바꾸는 작업을 했었는데.

신유아 = 코스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연대 요청을 해와서 여의도 농성장에 갔더니 사람이 혐오감을 가질 만한 분위기였다. 성황당 같은 느낌에 노숙인들 느낌에. 여의도 한복판이 얼마나 ‘삐까번쩍한가’. 농성이란 게 사람들에게 내용을 알리고 소통하는 것이기도 한데 사람들이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쳤다. 농성장을 전시장으로 만들자, 사람들이 편하게 와서 그 내용을 볼 수 있도록 해보자 해서 미술가들을 섭외했다. 작가들만 작업한 게 아니라 조합원들이 함께했다. 앉아서 선전물만 나누어주던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자기 공간을 만들어가니 너무 즐거워들 했다. 반응도 좋았다. 지나쳐가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유심히 보고가기 시작했다. 그 경험을 통해 문화활동가로서 나름의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김규항 = 공공미술이라는 게 큰 빌딩 앞에 세워둔 수천 수억짜리 조형물만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사람들이 소통하는 매개가 되는 것이라면 성공적인 공공미술 작업이었다. 용산 참사현장에선 1년을 꼬박 있었다.

신유아 = 아침 일찍 텔레비전을 켰는데 화면에 자막이 나왔다. 너무나 놀랐고 일단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날부터 출근을 현장으로 했다. 문화예술인들과 모여서 기자회견을 열고 뭘 할 것인가를 궁리했는데 공연 같은 건 적어도 몇 달 동안은 현장 정서상 하기가 어려웠다. 억울한 현장, 시커먼 현장, 눈물의 현장이었다.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이 일을 사회에 알려야겠다는 생각에서 내가 가진 모든 네트워크를 총동원하는 건 물론 송경동 시인이나 이윤엽 작가의 네트워크까지 동원했다. 활동에서 의지도 열정도 좋지만 네트워크가 가장 중요하구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없구나 깨닫게 되었다. 네트워크는 활동에 필수적일 뿐 아니라 또다른 네트워크를 만들어가고 그 자체가 활동이 된다. 

김규항 = 긴 시간 동안 많은 예술가들이 활발하게 결합했다. 비결이 있었는가.

신유아 = 전에는 대개 기획을 다 해놓고 예술가들을 부르는 방식이었다. 용산은 예술가들을 힘닿는 데까지 모아서 뭘할지를 함께 고민했다. 전에는 예술가들이 반농담으로 ‘내가 도구야’ 타박도 했는데 이젠 너나없이 ‘이건 인디뮤지션 누구를 하면 좋겠다, 여긴 미술가 누가 하면 좋겠다’는 식으로 함께 하니 활력이 생겼다. 

김규항 = 예술가들이 스스로 주체가 되고 또 저마다의 창의적 아이디어를 모으니 활력이 넘칠 수밖에. ‘쓰레기 예술가, 재활용 예술가’라는 별명도 용산에서 붙은 건가.

신유아 = 현장에서 쓰고 난 혹은 버려진 것들로 뭔가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용산에선 집회 때 바닥에 깔개로 쓴 스티로폼들이 있었는데 그걸로 뭘 할까 고민하다 꽃 모양으로 파서 남일당 건물 펜스를 꾸몄다. 

김규항 = 용역들이 가만 있지 않았을 텐데. 

신유아 = 처음엔 와서 보고 가고 하더니 작업이 점점 커지니까 위협을 하기 시작했다. 용역들은 현장이 자기네 거라고 생각하니까 ‘왜 우리 물건에 손을 대는가’ 식으로 시비를 걸어왔다. 내 차를 펑크 내기도 하고 밤길 조심하라고 위협도 하고. 현장에 있을 땐 그나마 괜찮았지만 집에 다녀올 때는 많이 불안했다. 

김규항 = 그렇게 애써 만든 작업들이 결국 사라지는 게 아깝진 않나. 

신유아 = 공공의 것이 되고 예술 작품으로서 존중되었으니 소멸되어도 아깝진 않다. 

김규항 = 스무살 무렵에 다니던 교회 전도사가 수련회에 드럼을 가져오라고 해서 가져갔다가 교회에서 쫓겨날 뻔 한 적이 있다. 당시 밴드음악은 사탄의 음악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교회는 낙원상가 드럼가게의 고객이 되었다. 문화적 변화엔 진통이 있기 마련인데.

신유아 = 처음 활동할 무렵엔 현장에서 민중가요가 아닌 대중가요를 틀면 반감이 컸다. 그런데 만날 투쟁가요만 틀어놓으면 연대하고 싶어도 부담스러워 연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인디뮤지션들이다. 그런데 인디뮤지션들의 음악과 가사엔 투쟁하는 사람들의 고통과 소망이 다 담겨있다. 두 문화가 서로 천천히 스며들면서 변화하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김규항 = 시위 현장이라는 게 늘 평화로운 건 아니니 익숙지 않은 뮤지션들에겐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신유아 = 무대 위에서 공연 중일 때 경찰이 치고 들어오는 경우는 드물다. 사전에 제지하거나 마치고 치거나 하는데 광화문에서 한번은 한창 연주하는데 경찰이 무대로 난입했다. 그 밴드는 지금도 공포가 있다고 한다. 현장에 왔다가 분위기가 살벌하니 연주 5분 전에 포기하고 간 밴드도 있었다. 그런 경험들을 하면서 섭외할 때 현장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김규항 = 김진숙 농성 100일차 129일차에 예술가들이 85호 크레인 앞에서 작업을 한 건 희망버스의 교두보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3차 희망버스 행사에 참가한 성소수자들이 만든 퀼트 작품 (경향신문DB)



신유아 = 그게 희망버스의 교두보라는 생각을 하고 간 건 아니었다. 그런데 나중에 경찰 조사를 받는데 경찰이 그게 희망버스의 사전 조직작업이 아니었나 다그치는데 비로소 ‘아 그렇구나’ 생각이 들었다. 

김규항 = 그때 예술가들이 신명나게 작업하고 노는 모습이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신유아 = 김진숙씨가 워낙 높은 데 있으니 밑에서 뭘 해도 잘 안 보였다. 플래카드 작업을 하고 내려다보이는 데서 놀고 오자였는데 조선소여서 철 폐품들이 굉장히 많았다. 용접 설비도 다 있어서 조각하는 작가가 그걸 끌어모아 밤새 ‘85’를 만들었다. 129일차 때는 영상 작가들과 가서 크레인에다 영상 쏘고 역시 밤새 놀았다. 

김규항 = 운동에서 문화적인 감성을 갖는다는 건 남들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을 보는 것이기도 하다.

신유아 = 집회든 행사든 말은 누구나 참여를 환영한다고 하지만 장애인 운동하는 분들이나 소수자운동하는 분들의 연대는 불편한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장애나 소수자활동가들이 연대하기 불편한 점이 있다는 건 그들의 싸움에 대한 연대도 활발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특히 노동운동 쪽에 그런 경향이 많아서 늘 현장에서 그걸 염두에 두고 고민하는 편이다. 

김규항 = 장애인운동 활동가들이나 소수자운동 활동가들처럼 잘 싸우는 사람들이 없고 그들처럼 신념이 또렷한 사람들이 없다. 워낙 열악한 상황이다보니 성찰적이기까지 해서 참 배울 게 많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며칠 전 콜트콜텍 대법원 판결이 나왔는데 ‘신나는 투쟁’이라는 이름으로 오래 결합해왔다. 

신유아 = 콜트콜텍은 알다시피 기타를 만드는 공장이다. 보통의 경우는 뮤지션들에게 연대를 요청할 때 뭐하는 공장인지부터 설명해야 하는데 이 경우엔 다들 선뜻선뜻 연대했다. 콜트콜텍을 안 써본 뮤지션이 없었다. 

김규항 = 노동자들도 마찬가지 아니었나.

신유아 = 노동자들은 악기를 만들지만 공연하는 사람들을 접한 적은 없었다. 뮤지션들이 연대하고 함께 하니 그렇게 즐거워할 수가 없었다. 뮤지션들도 내가 사용한 악기가 이렇게 힘들게 일해서 만들어졌구나 되새기며 즐거워했다.

김규항 = 악기 만드는 공장이니 뭔가 다를 것 같지만 자본주의라는 게 그런 정체성과 노동의 정서적 연결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 체제 아닌가. 정작 기타를 만들 땐 몰랐다가 정리해고를 당하고 투쟁하면서 자신의 노동이 무얼 만들어내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으니 참 역설적이다.

신유아 = 기타를 만들지만 기타를 칠 줄 아는 노동자가 없었다. 그런데 투쟁을 하면서 밴드도 만들고 이젠 공연을 할 정도다. 싸움이 어떻게 귀결되는가와 별개로 그들의 삶에 작은 기쁨과 힘이 된 것 같아 참 좋다. 

김규항 = 늘 현장과 결합하니 지사적으로 보일 수도 있고 비장하게만 보일 수도 있는데 한편으론 어떤 예술가나 작가보다 즐겁고 행복하게 작업해온 것 같다. 

신유아 = ‘너무 힘들겠다’ ‘정말 고생한다’는 말을 늘 듣고 살고 또 그런 면도 없진 않지만 현장에서의 순간순간들은 너무나 신나고 재미있었다. 잘 아는 노동운동가가 자기들 운동의 내부나 상층조직과 사업을 벌일 땐 진행이 너무 더디고, 진행하다가 폐기되는 경우도 많은데 문화적인 연대 사업을 하면 진행도 빠르고 역동적이라는 이야기를 하더라. 장난스럽게 젠체하며 ‘노동과 문화는 사실 하나야’라고 말해주었다.

김규항 = 문화 예술인들도 결국은 문화노동자 혹은 예술노동자라는 걸 운동 진영에서 잘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상업적인 예술가들, 주류사회의 유명한 예술가들의 천문학적 작품료는 당연시하면서 정작 진보적인 문화 예술인들에겐 다른 태도를 보이는 건 아쉬운 일이다.

신유아 =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 같은 큰 조직에서도 비용책정에서 가장 마지막에 배치하거나 책정 자체를 안하는 경우가 많다. 토론회 같은 걸 하면 사회자나 발제자에게 비용 책정이 되는데 공연에 참여한 사람에겐 ‘재능후원’이 강요되는 건 잘못된 일이다. 그렇다면 존중의 태도라도 가져야 하는데 공연 출연자에게 시간이 부족하다며 발언을 못하게 한다든가 하는 일도 흔하다. 사실 상업성을 지향하지 않는 문화 예술인들은 가장 어려운 상황의 노동자들보다 더 어려운, 말 그대로 굶으며 예술하는 사람들이다. 바뀌어야 한다.

김규항 = 희망버스 때 시위문화가 바뀌었다라는 평가들이 나왔고 여러 신선하고 의미있는 시도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평가가 기존의 시위문화는 무조건 낡고 폐기해야 할 것으로 비약하는 건 우려스러운 일이었다.

신유아 = 과거의 방식에만 익숙한 사람들은 그것만 고집하고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는 사람들은 과거의 방식을 폐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 자체로 문화적이지 않다. 문화가 만나고 새로운 게 만들어지는 과정 또한 문화가 아닐까.

김규항 = 이른바 ‘진보적인 문화이론’이라는 게 유럽의 68혁명에 시원을 대고 있기도 하고 또 조금 짓궂게 말하자면 68 이후 유럽의 좌파들이 현실적 변혁이 어려워진 자신들의 처지를 문화이론의 현학성이나 난해함으로 드러내는 경향도 있고 해서 68같은 경험도 없고 이론적 배경도 없는 우리 사회에선 난해한 데가 있다. 

신유아 = 문화이론이 난해한 건 사실이다. 그나마 나는 제대로 학습을 하고 활동을 시작하지도 못했는데 거꾸로 현장에서 모든 걸 배웠다. 활동 속에서 그 난해한 이론들이 ‘아, 이런 이야기였나’ 되새겨지고 깨우쳐지는 경험을 종종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내가 정연한 이론을 가진 사람이기보다는 바보 같은 사람으로 보여지면 좋겠다. 그래야 원칙을 말하고 대의로 행동하는 데 불편이 없으니. 

김규항 = 치밀하고 신중하게 활동을 준비하는 것과 현장의 실천성을 조화시킨다는 건 언제나 어렵다. 

신유아 = 요즘 그런 고민을 한다. 깜냥에 그래도 경험이 쌓이고 이력이 붙었다고 몸을 움직이기 전에 고민을 지나치게 많이 하는 것이다. 예전엔 일단 느끼면 현장으로 뛰어들고 현장에서 고민하면서 실천했다. 이젠 고민을 많이 하다 보니 실천이 더디어진다. 좀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이다. 활동에서 시간이라는 건 따로 만들어지는 게 아닌데 말이다. 스스로 반성하고 있다. 문화 예술계에서 활동하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일단 현장에 와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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