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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당 심상정 상임선대위원장이 30일 국회에서 ‘21대 총선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심 위원장은 ‘이번 선거는 거대양당의 대결정치를 극복하는 선거’라고 말했다. 김영민 기자

정당명부비례대표제가 처음 도입된 2004년 17대 총선은 한국 정치의 개혁 원년이었다. 10석의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진입했고, 국회 곳곳에는 그동안 듣지 못했던 약자들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16년이 지났다. 4·15 총선 후보자 등록 결과 정의당은 비례대표 정당기호 6번을 받았다. 법을 바꿔서 세상을 바꾼다면 단 하나의 방법이 선거법 개정이라고, 그래서 원내교섭단체를 꾸리겠다고 장담했던 정의당의 기대는 산산조각 났다. 어찌 정의당의 비극이기만 하랴. 진보정당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6’이라는 숫자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이다.

정의당 안팎에선 후보 등록 전후로 심상정 대표 결단설이 흘러나왔다. 대표직 사퇴, 지역구 불출마 선언 등 꽤 구체적인 내용으로 확산됐다. 심 대표 결단이 당을 살리기 위해 희생했던 ‘노회찬 정신’을 되살릴 거란 기대까지 섞여 있었다. 심상정 책임론은 선거제 개정 협상부터 시작됐다. 더불어민주당은 비례 의석수를 줄였고 캡까지 씌웠다. 미래통합당은 협상장 밖에서 위성정당 창당을 압박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거대 양당의 기득권 사수용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신호였다. 심 대표는 정치개혁특위 위원장이었다. 대비책을 마련하든지, 협상장을 박차고 나와 시민들의 힘을 빌렸어야 했다. 당 비례대표 선출 과정도 도마에 올랐다. 진보 대표성은 차치하고라도 음주운전 전력이 드러난 후보를 사퇴시켰다면 대리게임으로 공정성 시비가 불거진 후보도 사퇴시켰어야 맞다. 하지만 한 후보만 물러났다. 근본적인 문제는 진보 정체성이 흔들렸다는 점이다. 정의당은 조국 대전에서 민주당 2중대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그런데 얼마 전 참회 기자회견을 했다. 또 전 지역구에 후보를 내면서 민주당과 단일화 불가 방침을 선포했다. 그러더니 심 대표는 비례위성정당을 놓고 통합당은 비난하면서도 민주당은 안타깝다고 했다. 최근 정의당 지지율은 한 자릿수로 곤두박질쳤다. 선거제 개정을 안 했을 때보다 혼탁해진 상황이다. 심 대표의 정치적 명운을 건 결단이 국면전환의 계기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권영길 초대 민노당 대표에게 물었다. 내 생각에 확신을 더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권 전 대표는 “정치가 없어진 마당에 정의당이 몇 석 더 얻겠다고 애쓰면 뭐하나. 대표 사퇴 외칠 때가 아니야. 선거 기술로 표가 올 거 같아? 안 와. 김종인 등장이 정의당에 남은 마지막 기회야. 또 경제민주화 외칠 텐데 ‘한 번 속지 두 번은 안 속는다’고 혼내야지. 진보정당이 16년 전 외쳤던 경제민주화, 부유세, 무상 시리즈를 10년 전부터 보수 정당도 따라 하잖아. 그땐 진보정치가 다른 세상을 만들 수 있단 걸 보여줬어. 지금은 그런 각오가 필요한 때야. 우리가 품었던 꿈만 빼고 다 내려놔야지. 그래야 부활이라도 할 수 있어.” 

정의당은 당장의 생존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진보는 선명성만으론 안돼. 삶이 고달픈 사람들 곁에서 오래 같이 있을 각오를 해야지. 공중전, 그만하자고”라는 말도 덧붙였다. 진보정치 원로는 구로동맹파업을 이끌었던 심상정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노동자들의 꿈을 당연한 일상으로 만들기 위해 최장기 여성 수배자라는 고통을 감내했던 그 정신을 다시 새기라는 충고였다.

맞다. 진보 지지층이 무당파로 돌아서는 마당에 정치공학이 무슨 해법이 되랴. 위성정당까지 들어선 이상 기득권 정치는 더 공고해질 것이다. 오히려 진보정치의 존재 이유가 더 분명해졌다. 게오르규가 말한 잠수함 속 ‘토끼’처럼.

지난 대선 ‘최후의 1분’이 떠오른다. 심 대표는 TV 토론에서 동성애자 찬반 논란에 빠진 여야 후보들에게 맞서 “성소수자의 인권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말로 1분을 채웠다. 시대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사회가 어디서 썩고 있는지 정치가 짚어낸 순간이었다. 대선 결과, 정의당은 패했지만 심상정의 1분은 이겼다. 이번에도 ‘심상정의 1분’을 기대한다. n번방 사태였으면 좋겠다. n번방 사태는 모든 젠더 모순들이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지점까지 왔고, 인류 절반인 여성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시대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사회가 어디서 썩고 있는지 정치가 짚어내야 할 순간이다. 심 대표는 중대 결단을 앞두고 청계천 전태일 거리를 찾는다. 30일 정의당 일정이 기자들에게 고지됐다. 심 대표는 전태일 거리가 아닌 국회 본관에 선다. ‘심상정의 1분’을 기다린다.

<구혜영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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