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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의 평범한 직장 생활자들도 일이 예상대로 처리될 경우와 그렇지 않을 경우에 대비해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수립하는데, 한 나라의 국정을 책임지는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진이 탄핵심판이란 국가중대사를 앞두고 탄핵이 인용될 경우와 기각될 경우에 대비해 아무 준비가 없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탄핵 인용 이후 드러난 여러 정황과 보도를 살펴보면 대통령 참모진은 처음부터 탄핵 인용 가능성에 대해 보고조차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대책 없는 전 대통령과 참모진의 일사불란(一絲不亂)이 일으킨 분란(紛亂)을 보면서 세월호 참사에 숨겨진 이면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941년 6월22일,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다. 역사상 최고의 스파이로 손꼽히는 소련 첩보원 조르게는 침공 9일 전에 이미 “독일이 6월22일 새벽에 9개 군 150개 사단으로 공격할 것”이라는 정확한 정보를 제공했다. 뿐만 아니라 처칠과 루스벨트 역시 국경에 독일군이 집결 중이란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개전 초기 소련은 독일에 철저하게 패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스탈린이 독일과의 전쟁을 바라지 않는 마음이 컸기에 어떤 경고나 정보도 믿지 않았다. 두 번째는 투하체프스키를 비롯해 유능한 지휘관들을 대거 숙청하고 그 자리에 충성스럽지만 무능한 충견들을 배치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전선이 무너지고, 지상에 주기돼 있던 1200여대의 공군기가 파괴당하는 순간까지도 스탈린은 이런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대국민 성명을 발표한 것은 전쟁이 터지고 열흘이나 지난 뒤였다.

히틀러 역시 암살 음모와 쿠데타에 대한 두려움으로 군부의 병력 이동을 철저하게 통제했다. 1944년 6월6일 새벽, 15만6000여명의 연합군이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했다. 독일의 일선 사령관들은 이들을 저지하기 위해 기갑사단의 이동이 필요했지만, 하필 그 시간에 히틀러는 관저에서 자고 있었다.

그의 잠을 깨우는 것이 두려웠던 참모진과 보좌관들은 그날 오전 11시까지 히틀러를 깨우지 못했다. 평소 자고 있는 동안에는 절대 깨우지 말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그의 충성스러운 부하들은 연합군의 상륙을 저지할 수 있는 골든타임을 놓쳤다. 히틀러가 잠에서 깨어나 보고를 받았을 때는 연합군이 이미 교두보를 확보한 뒤였다.

권위주의 체제의 문제는 단지 정치권력 집중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국민 개개인의 심리구조에 심대한 정신 병리현상을 초래하는 것이다. 권위주의 체제의 해악은 개인의 삶을 결정하는 힘이 내부가 아니라 마치 물 위에 떠있는 작은 배처럼 외부의 힘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도록 만드는 것이다. 오랜 세월 이런 체제에 길들여진 사회는 위로부터 아래까지 강자의 힘에 의해 지배되고 조율되는 마이크로 파시즘적인 일상을 조성한다. 그런 사회에서 인간의 존엄과 개인의 권위란 자기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자신보다 약한 타인을 짓누르고 큰소리칠 때만 인정받는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개인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고, 만족하는 감정을 보람이라고 했을 때, 한국 사회에서 보람이란 내면적인 것이 아니라 외재적 가치, 다시 말해 자신의 존재 바깥에 있는 권력관계에 따라 끊임없이 요동친다.

자신의 양심과 내면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야만 체제에 적응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사회에서 출세하기 위해선 자신의 주체성을 내려놓고 외부의 권력 변화에 성공적으로 편승해야 한다. 표면적으로 대단히 강력한 듯 보이지만 권위주의 체제란 외부에서 몰아치는 격랑으로부터 권력 자신을 보호하려는 보호본능이 그 본질일 수밖에 없기에 어떤 분란도, 실패의 가능성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에 비해 민주주의 사회는 다양한 혼란과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 놓여있지만, 이를 대화와 타협으로 수용하여 타당한 절차와 투명한 정책으로 해결해 나간다. 이제야말로 권위주의 체제에서 벗어나 개인의 존엄과 권위가 바로 서는 민주사회로 나아가야 할 때다.

전성원 | 황해문화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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