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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물 한 방울의 부피는 0.05㏄다. 스무 방울을 합쳐야 겨우 1㏄가량 된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아마도 땅콩 한 알 정도에 해당하는 부피가 물 1㏄에 가까울 것이다. 무게로 따지면 약 1g이다. 적은 양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상황에 따라서 이는 엄청나게 넓은 공간으로 바뀔 수도 있다. 1989년 노르웨이 베르겐대학 연구진은 바닷물 1㏄에 바이러스 1000만마리가 산다는 연구 결과를 ‘네이처’에 보고했다.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 때문에 초긴장 상태여서 바이러스라는 말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듯하다. 그러나 바이러스에게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욱 신비한 뭔가가 있다. 과학자들은 현재 지구에 약 160만종의 바이러스가 존재할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그중 약 1%의 정체를 밝혀냈다. 이 말은 나머지 99%에 해당하는 바이러스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뜻이다. 어쨌든 바이러스는 크기가 아주 작지만 그 종류나 숫자는 어마어마하다. 현재 많은 수의 중국인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는 코로나19는 그중 하나에 불과하다.

과학자들은 바이러스를 생명체로 정의하는 데 무척 인색하다. 기본적으로 이들의 생활사가 숙주 생명체를 반드시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대물림되는 유전체와 그것을 둘러싼 단백질 외피로 구성된 단출한 형태인 바이러스는 다른 생명체 안으로 들어가야만 스스로를 재생산할 수 있다. 유전자를 복제하고 단백질을 조립하는 숙주의 물질대사 수단을 총동원해야 하기 때문이다. 숙주 세포 안에서 성공적으로 재생산을 마친 많은 수의 바이러스는 마침내 숙주의 세포막을 깨고 나와 새로운 숙주를 찾아 나선다. 

넉살 좋은 바이러스는 살아 있는 생명체라면 그 종류를 가리지 않고 숙주로 삼는다. 담배에 침입하여 모자이크 무늬를 갖는 전염성 질환을 일으키거나 동백 붉은 꽃잎에 하얀 반점을 새기기도 하고, 사람이나 고양이에게 백혈병을 초래하기도 한다. 단세포 생명체인 세균도 예외는 아니다. 바닷물 속에 사는 세균의 약 20%는 매일매일 이런 바이러스의 숙주가 되었다가 곧이어 죽음을 맞는다. ‘박테리아를 잡아먹는다(phagy)’는 의미를 담아 우리는 이들을 박테리오파지라고 부른다. 한 개의 세균을 터뜨리고 나오는 박테리오파지의 수는 100개가 넘는다. 요즘 TV에 나와서 세균이랬다 바이러스랬다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에게 이 ‘크기’의 엄정함을 얘기해주고 싶다. 평균적인 세균은 바이러스에 비해 사뭇 크다. 이렇듯 바이러스는 최근에 불거진 오명과는 달리 지구에서 세균이 무한 증식하지 못하게 막는 막중한 일을 한다. 

그렇다면 바이러스는 숙주 세포 안으로 어떻게 들어가는 것일까? 에이즈 바이러스를 예로 들어보자. 알다시피 이 바이러스는 면역계 세포인 T-세포를 공략한다. 목표를 ‘찾아 달라붙는’ 장치를 바이러스가 구비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돌연변이 표적 단백질을 보유한 일부 북유럽인에게는 에이즈 바이러스가 T-세포 안으로 잠입하지 못한다. 몸 안에 바이러스가 돌아다녀도 감염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입을 통해 폐로 들어가는 코로나19는 바깥쪽에 축구화 밑바닥에 박힌 것과 비슷한 스파이크 형태의 단백질을 가지고 있어서 폐의 상피세포 표면에 있는 수용체와 잘 결합한다. 구조적으로 서로 궁합이 잘 맞는 단백질 짝이 있어야만 세포에 쉽게 침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연구자들은 저 수용체 단백질과 결합할 수 있는 항체를 개발해 바이러스가 세포와 결합하는 일을 사전에 원천봉쇄하려 한다. 이달 초에 나온 논문을 보니 코로나19 침입을 저지할 수 있는 항체가 얼추 개발된 모양이다. 좀 두고 봐야겠지만 다행스러운 소식이다.

바이러스는 또한 존재 특성상 자신의 유전체를 숙주에 넣었다가 다시 빼는 까닭에 생명체 사이에 유전체를 운반하는 중요한 역할을 자임한다. 사실 지구에 태반 포유류가 등장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준 것 역시 바이러스였다. 자신의 유전체를 숙주 안으로 들여보내기 위해 바이러스 융합 단백질을 포유동물의 유전체 안으로 옮긴 사건이 생명체 역사의 어느 순간에 벌어진 것이다. 태반이 암컷 포유류 자궁 내막에 문자 그대로 ‘융합’되는 일이 일어났다. 그뿐만이 아니다. 사실 인간의 유전체 상당 부분은 바이러스에서 비롯되었다. 2016년 스탠퍼드대학의 연구진은 24종의 포유동물에서 지금까지 바이러스와 결합한다고 알려진 단백질, 약 1300개의 아미노산 서열을 비교 분석해보니 인간 단백질의 30%가 바이러스에 적응해온 강한 흔적이 보였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인간 단백질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폭넓게 바이러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다소 과장되기는 했지만 이 논문은 바이러스가 인간 진화를 가능케 한 ‘드라이버(driver)’ 역할을 했다는 논평과 함께 항간에 회자되었다. 

마스크를 쓰고 자주 손을 씻어서 바이러스의 범접을 막아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기는 하지만 사실 바이러스는 인간에게 관심이 없다. 가던 길에 우연히 박쥐나 닭 혹은 인간을 만난 것뿐이다. 농작물을 재배하고 가축을 사육하며 집단을 이루어 살게 된 인간은 이전보다 더 자주 바이러스를 소환해냈다. 바이러스 역시 빠르게 변신한 후 더 강한 모습으로 인류 앞에 등장하곤 했다. 이들은 자신의 유전체를 보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한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면역계는 강인하지만 가끔씩 이들 바이러스에게 무릎을 꿇기도 한다. 이렇듯 우리 유전체는 인간이라는 구조물의 청사진이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다른 생명체들과의 투쟁의 역사가 생생히 살아 숨 쉰다.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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