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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렇듯 우리의 오월은 경계에 서 있다. 겨우내 열려 있던 공간을 부리나케 푸른 잎들로 채운 오월은 봄을 성큼 지나 여름을 향해 가고 있다. 경계는 우리 몸 안에도 존재하는데 몸의 내부 장기를 외부와 연결한다. 호흡 과정을 통해 폐는 몸 구석구석에 산소를 공급한다. 소장을 거쳐 들어온 영양소도 전신으로 퍼져 나간다. 포유동물인 인간은 산소 또는 영양분과 마주하는 폐와 소장의 경계막을 충분히 접고 구부려 표면적을 극대화한 후에야 비로소 세포를 먹여살릴 수 있게 되었다. 피부 면적은 2㎡에 불과한 데 비해 인간의 평균 폐 표면적은 50㎡(약 15평)라는 사실을 생각해보라. 놀랍지 아니한가? 하지만 놀라기에는 아직 이르다. 우리 소화기관의 표면적은 그보다 서너 배는 더 넓다.  

먹고 숨 쉬는 경계의 표면적이 넓다는 점은 경이롭지만 그 현상이 산소와 영양분 흡수를 향한 우리 몸의 해부학적 안간힘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일견 슬프기도 하다. 어쨌든 표면적만 보아도 피부는 확실히 방어 기관이고 폐와 소장은 에너지와 물질을 몸속으로 끊임없이 집어넣는 역동적인 기관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하지만 오월이면 나는 또 다른 경계에 대해 생각한다. 바로 태반이다. 참 손이 많이 가던 아기가 제법 사람 꼴을 갖춘 일을 축하하는 어린이날이나 그 일을 묵묵히 감내한 어버이들의 사랑에 감사하는 어버이날이 공존할 수 있게 된 것도 바로 저 기관 때문이 아니던가? 인간의 배아가 발생하고 성장하는 과정에 필요한 모든 물질과 에너지를 공급하는 태반도 그 기능에 걸맞게 표면적이 11~14㎡에 달한다. 20㎝ 크기의 원반 모습을 띤 태반의 한쪽은 엄마의 자궁내막에, 다른 한쪽은 탯줄을 매개로 아기와 연결되어 태반 포유류 특유의 기관을 이룬다. 이들은 태반 없이 발생 초기에 태어난 새끼를 ‘육아낭’이라는 주머니에서 키우는 캥거루와는 사뭇 다른 생식 전략을 발전시켜 왔다. 또한 이 전략은 알에서 태어나 젖을 먹는 원시 포유류인 오리너구리 생식과도 큰 차이가 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발생학 강의를 하다 가끔 나는 “누가 태반을 만들었을까?”라는 생경한 질문을 던진다. 그러고 잠시 침묵의 시간을 갖는다. 당연히 ‘임부가 만드는 것 아냐’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은 질문자의 의도를 고려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린다. 사실 태반은 태아가 만든다. 정자와 난자 하나가 만나 새로운 삶을 시작한 수정란은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종류의 세포로 분화된다. 하나는 태아가 될 줄기세포들이고 나머지는 태반이 될 줄기세포들이다. 태아 줄기세포는 심장과 뇌, 피부 등등을 포함해서 약 3~4㎏에 이르는 신생아의 각종 세포로 분화하겠지만 태반 줄기세포는 태아와 산모의 경계면인 약 450g의 태반을 조직화한다. 이 태반을 통해 임부는 산소와 영양소를 공급하고 태아의 노폐물을 처리한다. 매분마다 임부의 심장을 빠져 나가는 혈액의 20% 정도가 태반을 경계로 태아와 마주한다. 이런 방식으로 태반 포유류는 조류 혹은 파충류의 탄산칼슘 알껍데기와 난황을 완전히 대체하고 자손을 보다 안전하게 이 세상에 내보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 전략이 임부의 부담을 크게 가중시켰다는 점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게 다가 아니다. 지구상에 태반 포유류가 등장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주연이 필요했다. 그 주인공은 바로 바이러스다. 애써 인정하고 싶지는 않겠지만 우리 유전체의 약 8%는 바이러스에서 유래했다. 바이러스는 유전자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껍데기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신을 복제하는 데 필요한 단백질 공장이 따로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이러스가 스스로를 복제하기 위해서는 세균이나 동물의 세포 안에 들어가 그들의 복제 기구에 무임승차해야 한다. 그렇게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고 그것을 일일이 조립한 후 바이러스는 숙주 세포를 터뜨리고 탈출한다. 역전사 바이러스라고 불리는 매우 특별한 한 종류의 바이러스는 자신의 유전체를 숙주 세균이나 인간의 세포 유전체에 슬며시 끼워 놓는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유전체에 바이러스의 흔적이 살아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오랜 세월에 걸쳐 누적된 돌연변이로 바이러스 유전체가 병원성을 잃은 데다, 또 숙주인 우리 세포도 이들이 함부로 날뛰지 못하게 면역계의 시선을 놓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 그렇듯 이러한 제어 장치도 완벽하지는 않아서 가끔 말썽을 일으킬 때가 있다. 여기저기 함부로 움직이기 때문에 점핑 유전자라는 이름이 붙은 바이러스 유전자 조각이 인간 유전자 중간에 끼어들면 암세포로 바뀌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아주 오래전 포유류 조상은 바이러스의 유전자 하나를 태반을 만드는 데 차출하는 술수를 발휘하게 되었다. 그것은 본디 숙주의 세포막에 바이러스의 껍데기를 합칠 때 쓰던 단백질이었다. 태반의 핵심인 영양막 세포는 ‘신시틴(syncytin)’이라 불리는 바로 이 바이러스 기원 단백질을 이용하여 임부 자궁 내막에 녹아 융합해 들어간다. 이런 방식으로 태아는 임부의 혈액으로부터 영양소를 효과적으로 확보할 전초기지를 마련했다. 프랑스 과학자 하이드만은 영장류 태반에서 신시틴 아형(亞型) 단백질을 발견하고 이것이 임부의 면역계를 약화시켜 태아를 공격하지 못하게 돕는 부가적 역할을 한다고 추정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바이러스의 도움이 없었다면 결코 존재할 수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최근 들어 바이러스에서 비롯된 유전자들이 태아와 임부 사이의 ‘의사소통’에 적극 참여한다는 연구 결과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인간의 유전체에 편입한 바이러스 유전체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오월은 한 세대가 다음 세대 혹은 이전 세대와의 자리바꿈을 공식적으로 기억하고 기념하는 달이다. 바이러스와 인간 사이에 맺은 생물학적 제휴 아래 비로소 이런 일이 가능해졌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키메라인 것이다. 6월이 오기 전에 부모님 산소에 다녀와야겠다.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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