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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봄 ‘김종필·오히라 메모’가 폭로되면서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대한 반대시위가 절정에 달했다.
한국 정부는 그해 6월3일 유엔군사령관 겸 주한미군사령관의 승인을 받아 한국군을 동원, 시민사회의 반대를 억눌렀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부터 1965년 2월까지 한·일 간의 조약을 마무리하기 위한 7차 회담에 들어갔다.
7차 회담에서 문제가 된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1945년 이전의 조약 처리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한반도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지위와 관련된 문제였다. 후자의 문제는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대한민국이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명시하고 한반도에 두 개의 정부가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말 것을 요구했고, 일본 정부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승인안에 근거해 한국 정부의 요구를 승인했다. 북한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향후 북한 정부와 협상이 가능할 수 있도록 여지를 남긴 것이다. 문제는 과거 조약이 무효가 된 시점이었다. 한국 정부는 1905년의 을사늑약과 1910년의 한일합방조약이 모두 강제로 맺어진 조약이니만큼 조약 자체를 무효로 봐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반면, 일본 정부는 일본이 패망하고 제국이 무너진 1945년부터 무효로 봐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의 전쟁 책임과 그에 대한 배상을 논의한 회담에서 나온 선언문은 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19년 이후 일본이 맺은 조약에 대한 무효를 규정해 놓았다. 1차 세계대전에서는 일본이 승전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전 식민지와 관련된 조약에 대해서는 일절 규정하지 않았다.
1965년 12월18일 중앙청에서 한일협정 비준서를 교환하는 이동원 외무장관과 시나 일본 외무상.
1945년 이전 일본과 맺은 두 조약이 그 자체로서 무효일 경우 한국 정부는 일본에 ‘배상’을 요구할 수 있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배상문제도 중요하지만,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명예에 큰 타격을 입을 수도 있었다. 또 식민지에 대한 배상은 일본뿐만 아니라 식민지를 보유했던 다른 유럽 국가들에도 영향을 미치는 문제였다. 1960년대에는 아직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국가들도 있었다.
양국 정부는 1945년 이전의 조약들이 언제부터 무효였는가를 합의하지 못한 채 ‘이미(already)’라는 단어를 ‘무효’ 앞에 넣었다. 그리고 한국의 국회와 일본의 중의원에서 양국 대표는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조약의 내용을 해석했다. 정말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다. 양국의 입장 차이를 글자 하나로 해결해 버리다니. 대한민국 정부의 지위에 대해서도 합의는 했지만, 관할권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해석 여지를 남겨두었다.
이렇게 동상이몽으로 합의된 1965년의 한일협정은 양국 정부의 ‘공식’ 협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50년 동안 수많은 논란을 빚었다.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일협정 직후부터 북한과 대화와 협의를 진행했다. 을사늑약과 합방조약이 100년이 지났지만, 그 자체로서 무효인가에 대한 논의는 한·일 양국의 정부뿐만 아니라 학계와 시민사회에서도 어떠한 합의조차 이루지 못한 채 논란만 계속되고 있다.
‘한·일 양국은 불행했던 과거를 넘어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가지만, 과거의 조약이 무효가 된 시점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연구를 통해 합의한다’고 솔직하게 했으면 어땠을까?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한·일 양국이 긴급한 문제를 함께 풀어 나갈 것을 합의하지만,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 등 양국이 합의하지 못한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연구를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솔직하게 합의했으면 어땠을까? 과거사 문제를 외교현안의 볼모로 삼았던 데에 근본적 문제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합의를 하면 모든 논쟁이 ‘불가역적’이 되는 것인가?
몇 년 전 일본 도쿄대에서 만난 한 학생은 “도대체 한국은 언제까지 일본의 사과를 요구할 것인가”라고 질문했다.
한국 사회는 “일본이 진정한 사과를 한 적이 있는가”라고 대응한다. 한국과 일본의 시민사회가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과거사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면, 정부 간의 합의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돈 외에는 어떠한 명분도 얻어내지 못했던 한일협정 후 50년의 역사는 한국 정부에 아무런 교훈도 주지 못했다. 반면 일본 정부는 50년 전과 마찬가지로 ‘불가역적 합의’로 모든 법적 책임에서 벗어나려 할 것이다. 국제사회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극우적 일본 정부가 할 만큼 했다고 평가하는 반면, 한국 정부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유가 무엇인지 냉철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박태균 | 서울대 교수·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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