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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인천 을왕리에서 일어난 교통사고 가해자들을 향해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다. 음주운전도 문제였지만 사고 직후 보인 태도가 더 큰 분노를 자아냈다. 영상을 보면 가해자들은 피해자를 내버려둔 채 차량 안에 머물렀다. 구급차가 도착하고 나서야 바깥에 나왔는데 이때 변호사와 통화하고 있었다고 한다. 구급차를 부른 것은 이들이 아니었다.

사건의 진상은 조사가 끝나야 알 수 있겠지만, 가해자가 119가 아닌 변호사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은 자못 충격적이다. 내게는 이 행동이 하나의 징후처럼 보인다. 가해자들이 차량에서 바로 나오지 못한 것은 사고를 낸 충격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린 후 맨 먼저 떠올린 생각이 ‘사람을 살려야 한다’가 아니라 ‘형량을 줄여야 한다’였다는 건 납득하기 쉽지 않다.

내가 이 일을 우리 사회의 징후로 간주하는 것은 가해자들이 죽어가는 피해자를 내버려둔 채 자기방어적 행동에 몰두했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변호사의 존재다. 119보다 먼저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변호사도 의사와 똑같은 조언을 할 수 있다. 빨리 구급차를 부르고 환자의 호흡상태를 확인해보라고. 그러나 변호사의 조언은 의사의 조언과 내용이 같아도 의미가 다르다. 구호조치를 충분히 하지 않았을 경우 생겨날 법적 불이익을 막아주는 것이다.

변호사는 우리 삶의 어디까지 들어와 있는 건가. 이번 사건은 차량이 사람을 들이받고 그 사람의 숨이 끊어지는 짧은 순간, 사고를 낸 사람과 사고를 당한 사람, 생명과 죽음, 그 둘밖에 없을 것 같은 순간까지 그가 들어와 있음을 보여준다. 사람이 사람의 도리를 해야 하는 순간, 그 이상 무엇을 할 수도 없을 것 같은 순간에조차 법률가의 조언이 개입한 것이다.

사람이 사람 도리를 해야 할 때
그 순간조차 법률가 조언 개입
감정적 격변 없이는 불가능한
잘못을 고백·사죄하는 행동이
무미건조하게 느껴지는 이유

마치 소송이 시작되기 전부터 소송을 진행하는 사회 같다. 실제로 이번 사건의 가해자들은 사고가 일어나자마자 재판에 임하는 행동을 했다. 설령 구급차를 불렀다고 해도 변호사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면 그것은 사람을 살린 게 아니라 감경 사유를 만든 것이다. 이런 식이면 나중에 행할 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위로도, 피해자 가족과의 화해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법정을 의식한 전략적 행동, 즉 변론의 일환이 되고 만다.

잘못을 인정하고, 고백하고,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고, 다짐하는 행동들, 자신의 감정적 격변을 동반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행동들이 우리 사회에서 무미건조하게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검찰이나 법원 앞에 선 정치인이나 기업가들은 똑같은 말만 한다. ‘사실을 인정하느냐’고 물으면 ‘성실히 조사에 임하겠다’고 답한다. 법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어떤 말도 하지 않으려다보니 언어 화용론적으로 엉터리인 답변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것이다.

언젠가 한 항공사 회장은 자식의 잘못을 자기 잘못으로 돌리고 용서를 구하는 감동적인 장면을 너무 어색하게 연기해서 회자된 적이 있다. 그는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치면서 할 법한 말을 무미건조하게 읽고는 갑자기 기계처럼 부자연스러운 인사를 몇 차례 반복했다. 그가 읽은 사과문 중간중간에 ‘90도로 인사’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인사’ 같은 지시 문구가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사건이 일어나면 당사자는 사라지고 변호사만 남는다. 당사자가 등장할 때도 그는 변호사의 말을 대신한다. 내 말을 변호사가 하든, 내가 변호사의 말을 하든 상관이 없다. 그런데 변호사는 잘못을 범한 사람이 아니므로 변호사가 시키는 행동, 변호사가 적어준 문구, 변호사가 대신 전하는 말에는 사죄의 마음이 담기지 않는다. 그래서 사죄의 마음을 담지 않은 채 사죄의 말이 전달되고, 책임을 회피한 채 입장 표명이 이뤄진다. 요즘에는 거의 모든 시사프로그램에 변호사들이 등장한다. 그들의 열띤 주장을 들을 때마다 나는 우리 사회가 법정 사회이고 우리는 매일매일 소송 중에 있다는 생각을 한다.

철학자 칸트는 일생을 미성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골치 아픈 일을 대신 처리해줄 사람을 고용하면 감정적 소모 없이 편안히 지낼 수 있다. 그러나 성숙한 인간이 될 수는 없다. 성숙은 문제와 대면할 용기를 필요로 한다. 진심으로 고백하고 사죄하고 다짐하는 인간은 견디기 힘든 감정적 격변을 치러야 하는데 성숙은 그 포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항상 변호사에게 먼저 전화를 거는 개인이나 사회는 온갖 일을 겪어도 성숙할 수 없다.

<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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