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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다닐 때 별로 없던 책이 본격적으로 늘어난 것은 대학원 시절부터다. 현금을 주고 살 수 없는 영인본을 외상으로 사고 달마다 갚아나갔다. 그렇게 해서 늘어나는 책을 보면서 내 지식이 늘어나는 것처럼 착각하며 뿌듯해한 적도 있다. 한데, 대학에 자리를 잡고 나니, 책이 불어나는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책을 사는 핑계도 여럿이다. 지금 진행 중인 연구에 꼭 필요한 책이기 때문에 사들이는 경우는 나무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연구와 관계없는 책도 사들이는 데 문제가 있다. 전공과는 상관없지만 워낙 고전으로 소문이 난 책이라서, 그 책을 읽지 않으면 무언가 시대에 뒤떨어질 것 같아서 산다.

또 내가 이런 책을 사주지 않으면 누가 사주랴 하는 어쭙잖은 동정심(?)에서 산 책도 있고, 심지어 장정이 너무 좋아서 산 책도 있다. 이러니 연구실은 물론 집에도 책이 자꾸 쌓인다. 17년 전 이사한 집은 애초 입주할 때 가장 큰 방 사면에 책장을 둘러 넣어 아예 책방으로 만들어 책을 쌓기 시작했고, 나머지 방도 아이들이 자라서 집을 떠날 때마다 하나씩 책방으로 바꾸었다.

그러고도 책이 넘쳐 일부는 솎아서 버렸다. 소용이 닿지 않아서, 그리고 영원히 볼 것 같지 않은 책이라서 버린 것이지만, 한 권 한 권 살 때의 추억이 떠올라 적잖이 섭섭했다.

정년을 한다면 이 책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가까이 지내는 교수님들과 이 문제를 이야깃거리로 삼아 종종 한담을 나누기도 한다. 그분들 역시 공부 욕심, 책 욕심이 많아 적지 않은 책을 가지고 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녀가 부모와 같은 분야의 학문을 하는 경우다. 그냥 물려주면 된다. 고민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이 경우는 아주 드물다. 가까이 지내는 어떤 교수님은 정년 뒤 어디 큼지막한 공간 하나를 빌려 거기에 책을 모두 가져다 놓고 작은 도서관을 만들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다. 그 작은 도서관에 매일 출근해 책도 보고 저녁이면 석양주도 한잔 하는 것이다. 하지만 공간을 빌리는 비용이며 책의 관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역시 공상에 가깝다.

대개는 정년 뒤 자신의 책을 대학 도서관에 기증하기를 원한다. 예전에는 도서관에서 무척 좋아했지만, 요즘은 썩 반기지 않는 눈치다. 21년 전 대학에 부임한 해 어느 봄날이었다. 정년을 한 노교수님 한 분이 연구동 복도에서 혀를 차면서 ‘무슨 이런 짓을 하누’ 하신다. 여쭈어 보니 도서관에 자신의 장서를 기증한 뒤 시간이 지나 찾아갔더니 복본을 모두 골라서 어디 구석에 쌓아놓았더란다. 그래서 짠한 마음에 자신이 있었던 연구동으로 다시 가져왔다는 것이다. 집으로 가져가기 위해서였다.


평생 애지중지 끼고 살던 책들이 버림을 받아 팽개쳐진 꼴을 보면 분하고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도서관의 처지도 이해는 된다. 책은 쏟아져 나오고 서고는 부족하다. 무한정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이다. 해서 복본을 버릴 요량으로 솎아내어 둔 것이리라.

그게 기증자의 눈에 뜨이지 않았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인데, 마침 눈에 뜨이는 바람에 기증자를 한없이 섭섭하게 한 것이리라. 이런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책 많기로 소문난 어떤 교수님은 대만에 기증했고, 어떤 교수님은 일본에 기증할 예정이라 했다.

한동안 한 달에 두어 번 보수동 헌책방 골목을 찾았다. 버스를 타고 가서 남포동에서 내려 먼 길을 산보 삼아 걸어간다. 이따금 눈에 걸리는 책을 사서 배낭에 쑤셔 넣는다. 그런 나를 보고 아내는 집에도 책이 적지 않건만 보지도 않을 책을 무얼 그리 사느냐고 나무란다.

대답할 말이 궁하다. 공부하는 딸에게 물려줄까도 하지만, 전공이 달라 필요한 책만 좀 솎아내면 나머지 대부분의 책은 갈 곳이 없을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도서관에 기증할까 생각해 보지만, 거개 도서관에 있는 책일 것이고 희귀본이 있는 것도 아니니, 대부분 솎아내어 버릴 것이다. 요컨대 도서관 직원만 귀찮게 할 뿐 결코 반가운 대상은 아닐 것이다.

에라, 그래, 그럼 묶어서 팔아버리자! 속이 갑자기 시원해졌다. 그런데 이따금 보수동 헌책방 골목에서 책을 뒤지다가 내가 아는 분의 장서인이 찍힌 책을 보면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래서 일괄해 파는 것도 보류할 수밖에.

다시 궁리에 궁리를 거듭한 결과 묘안을 생각해냈다. 어느 날 보수동 골목을 걷다가 아내더러 나 역시 정년 후 보수동에서 책방을 하나 내면 되지 않겠냐고 제안을 했다. 집에 쌓인 책에 넌덜머리가 난 아내는 즉각 정말 괜찮은 생각이라고 하면서, 작은 책방에 들러 이런 규모의 가게를 얻는 데 얼마면 되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그리 많은 돈은 아니었다. 또 내가 가진 책이면 그런 책방 서너 개는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참으로 황홀한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점잖게 책방에 앉아 책을 읽다가 손님이 오면 책을 챙겨 주면 그만이다. 돈을 벌자고 하는 일이 아니니 책이 안 팔린다고 안달복달할 것도 없다. 친구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오면 그 날 책 판 돈을 가지고 아래쪽 동네, 곧 깡통골목, 국제시장, 남포동, 광복동으로 건너간다. 구석구석 좋은 술집 천지다. 대폿잔을 기울이면서 하루를 마친다. 어떤가. 황홀하지 않은가.

이 기막힌 계획을 주위 교수님들에게 털어놓았더니, 모두들 환호작약하면서 좋은 아이디어라고 칭찬이 자자하다. 더욱 고무적인 것은 여러 교수님들이 자신의 책도 ‘강 교수의 책방’에 내놓을 터이니, 팔아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책방을 아지트로 삼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는 것이었다. 대충 계산해 보니, 그 교수님들의 책만 모아도 몇 만 권을 훌쩍 넘는다. 따라서 책의 공급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아마 이 소문이 나면 다른 교수님들도 동참할 터이고 그러면 ‘강 교수의 책방’은 20~30년은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책의 입장에서도 폐가도서에 꽂혀 있다가 소각되는 운명을 맞는 것보다 헌책방의 서가에서 자신을 읽어줄 새 주인을 기다리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할 것이다. 아, 그러고보니 나는 정년 뒤 내 책의 처리와 두 번째 인생의 계획까지 벌써 완벽하게 세웠구나! 행복하여라!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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