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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불로소득시대에 살고 있다. 작년 중반, 이미 경실련은 지난 3년 동안 서울 아파트값 상승으로 생긴 불로소득을 493조원으로 추정했다. 저금리 시대에 민간투자금은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부동산, 동학개미, 코인시장 등 돈의 쓰나미는 무섭게 휘몰아친다.

한국 현대사에서 불로소득은 1970년대 압축성장, 개발경제, 1997년 외환위기 등의 여파로 탄생한 잉여가치를 사회적으로 관리하는 데 실패한 시대적 산물이다. 자산소득은 이미 오래전에 근로소득을 앞질렀고, 노동시장 양극화로 질 낮은 일자리의 비중이 점차 늘어났다. 시중의 유동자금은 상시적 투기현상을 낳았다. 지금의 부동산 가격 급등은 한 정부의 정책실패 탓이라기보다 오히려 한국 현대사에서 지속적으로 축적되어 온 자본소득 과속 현상의 필연적 결과물이었다.

돌이켜보면, 근대사회는 노동과 능력의 가치 위에 세워진 사회체계이다. 전통적으로 노동의 신성함과 인간의 근면함에 기초하여 모든 불로소득을 선하지 않은 것으로 보았고, 애덤 스미스조차 불로소득에 대한 세금에 찬성하였다. 학교는 그런 철학과 노동관을 전파하는 가장 핵심적 사회기제였다. 학교에서 아이들은 노동은 신성한 것이며, 능력과 경쟁을 통해 성공할 수 있고, 자유롭고 평등한 기회를 통해 사회적 불평등은 지속적으로 교정되어 나가야 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불로소득이 성장을 견인하는(?) 시국에 이 전제는 힘없이 무너진다. 당장 학교가 사회평등화 기제라는 전제가 부정된다. 아이들은 공부가 성공을 보장하지 않으며, 미래를 결정하는 데 절대적 요인이 아니라는 점을 안다. 공부가 월급 몇 푼으로 치환되는 세상이라는 걸 간파하고 있다. 건물주가 되지 못할 바에야 사실상 노예일 수밖에 없는 근로자가 되기 위해 그토록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현실을 거부한다. 결국 대학입학지원자 수는 당연히 이 영향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

민주당이 이번 선거에서 실패한 이유는 분명하다. 불로소득시대의 ‘사회양극화’가 소득의 양적 차이를 넘어 사회계급적 구조화로 전화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단지 면피하려고만 했기 때문이다. 자본소득의 기하급수적 증가를 즐기고 세습하는 계급과 여전히 제한된 노동소득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계급 간의 분리현상을 솔직히 공론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당 지도층 인사 가운데도 그런 ‘세습’에 편승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현상의 실체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하고 여전히 ‘겉으로만’ 공정, 공정, 공정을 외쳤기 때문이다. 공정 사회는 결코 입시제도 개선이나 청년 창업 혹은 종부세 인상 등의 미시적 조정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기성세대보다 현명하다. 이미 공정사회가 한물간 유행가라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그나마 절차적 공정성이 남아있어 보이는 ‘시험’에 목숨을 걸고, 공무원시험에 매달리고, 정년이 긴 직장을 찾아다닌다. 이런 청년세대를 기성세대는 꿈이 없는 세대로 몰아붙인다.

아이들은 베이비부머 기성세대가 가졌던 그런 성공신화나 꿈을 버린 지 오래다. 미래는 사치스러운 단어이며, ‘지금’을 가장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죽은 시인의 사회>가 던져준 “카르페 디엠”, 즉 현재를 소중히 여기라는 말이 지금 와서 더 아이들의 마음을 울린다. 기왕이면 욜로(Yolo), 즉 한번 사는 인생을 의미있게 살아보고 싶어한다. 아등바등 ‘영끌’을 하더라도 어쨌든 살아보려는 이들의 눈은 충혈되어 있다. 이런 걸 인생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런 지옥에서 빨리 벗어나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마음은 엉뚱하게도 ‘빨리 벌고 빨리 은퇴’하는 파이어족에 대한 동경을 낳는다.

사정이 이렇다면, 이 시대에 학교는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지금까지 가르쳐왔던 근대정신으로서의 자유와 평등, 공정성과 노력의 가치는 재해석되어야 할지 모른다. 우등생-명문 대학-좋은 직장-인생 성공으로 이어지는 환상이 인생을 바꾸어 놓기는 어려울지 모른다고 말해줘야 한다. 부모들은 아이들을 학원으로 내몰던 습관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의 미래가 그리 밝지 않다는 점을 솔직히 말해 줘야 한다. 그래서 공부의 의미가 이제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고 가르쳐야 한다.

이참에 학교도 존재 이유를 근본부터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사회발전의 도구로 인간을 규정해왔던 낡은 철학을 버리고 현재를 살아가는 아이들의 삶을 소중히 여기는 새로운 교육논리를 다시 설계할 필요가 있다. 어차피 공부 잘해서 돈 많이 벌 수 있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숭희 서울대 교육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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