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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일보 입사시험 면접을 보러 가기 위해 서울역에서 시청까지 걸어가던 오래전의 어느 새벽이 떠오른다. 이십대 중반, 서슬 퍼렇던 군부독재 시절의 일이다. 정부가 주인인 신문이었지만 필기시험을 통과한 것만으로도 ‘시골청년’이었던 나는 한껏 고무돼 있었다. 밤기차로 올라와 새벽의 노점상에서 싸구려 토스트 한 조각을 사먹고 난 ‘청년’은 시청 앞까지 더듬더듬 걷는다. 섬뜩하게 추운 날씨다. “잘살아보세~”로 시작되는 새마을노래가 시청 앞 가로에 힘차게 울려 퍼지는 중이다. 최종 면접 과정만 남긴바, 순진하게도 청년은 ‘특별시’에서 말뚝 박고 ‘잘 살아볼’ 절호의 찬스를 맞았다고 상상한다.

간단하게 끝나리라 생각했던 면접은 거의 하루 종일 진행된다. 상식문답 코스, 영어면접 코스도 있다. 마지막이 사장 면접이다. 사장실 앞에서 순서를 기다리며 청년은 자꾸 시계를 본다. ‘특별시’에서 머물면 돈이 더 들기 때문에 어떡하든 면접을 끝내고 다시 기차를 타고 내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밤새 기차를 탄 데다 아침, 점심을 대충 때웠을 뿐인 청년은 긴장과 피로와 공복감 때문에 거의 쓰러질 것 같다. 순서가 다가오자 잘 차려입은 사장 비서가 설명해준다. “안에 들어가면 백묵으로 두 개의 동그라미를 그려놓은 자리가 있는데요, 그 동그라미에 두 발을 대고 서서 사장님께 구십 도로 인사하세요. 꼭 그곳에 서야 돼요!”

사장실로 들어선 순간 눈에 확 들어온 것은 붉은 카펫이다. 청년으로선 세상에서 처음 보는 화려한 깔개이다. 수술이 부슬부슬 올라온 카펫이고, 그러므로 당연히 ‘동그라미’는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164센티미터, 55킬로그램의 허약한 청년이다. “그 동그라미에 두 발을 대고.” 비서의 말이 계속 고막을 쾅쾅 울린다. 문제의 동그라미를 찾아 서지 않으면 입사시험에서 떨어질 거라는 강박에 청년의 걸음걸음이 자꾸 휘청댄다. 교실 한 칸은 됨직한 너른 사장실이다. 자신보다 앞선 면접자들이 이미 여러 번 밟고 섰으니 백묵으로 그려놓은 카펫 위의 동그라미가 제대로 남아 있을 리 만무하지만 청년은 거기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다.

한순간 우렁우렁 말소리가 울린다. 누가 자신에게 던지는 말이라는 걸 청년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린다. 스톱모션이 되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청년의 가슴이 또다시 철렁 내려앉는다. 말한 사람이 얼른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년이 미처 대답을 못하자 두 번째 말이 정수리를 때린다. 말소리가 천상에서 내려오는 것 같다. 청년은 비로소 시선을 치켜들고 말의 주인을 간신히 찾아 올려다본다. 저 높은 곳, 육중한 책상 너머로 낯선 얼굴이 보인다. 사장님이다.

사장은 그가 서 있는 곳보다 최소한 예닐곱 계단을 올라간 자리에 앉아 있다. 사장실이 반으로 구획되어 있다는 걸 청년은 그제야 깨닫는다. 이를테면 직원이 결재서류를 가지고 사장실에 가면 일단 낮은 곳에 서서 높은 곳의 사장에게 차렷 자세로 절을 하고 난 다음 사장의 허락을 받아 예닐곱 계단을 올라간 뒤 결재를 받는 식이다. 사장의 두 번째 하문을 받고 나서야 흐릿해진 동그라미 두 개가 바로 발 앞에 있는 걸 청년은 발견한다. 그제야 동그라미가 보이는 게 너무도 억울하다. 사장의 하문에 얼른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알 수 없는 치욕감 때문에 왈칵 눈물이라도 쏟아질 것 같아 청년은 다만 피가 배어나오도록 입술을 깨물고 있다.

나는 물론 그해 면접시험에서 낙방한다. 불안과 피로에 쩐 나는 그때 보나마나 새카매진 얼굴, 때꾼한 눈빛이었을 것이다. 광기의 세상에서 어떡하든 ‘특별시’에다가 삶의 끈을 비끄러매보자고 백묵으로 그린 동그라미를 찾아 갈팡질팡하는 ‘시골청년’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사장의 머릿속에 지나간 것이 연민이었는지 혐오였는지는 여전히 분명하지 않다. 사장이 나를 내려다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든 그것은 아무 상관도 없다. 오래 지날수록 더욱 공고해지는 것은 거의 지워진 동그라미를 찾아 우왕좌왕하는 젊의 나의 모습일 뿐이다. 특별시 시민이 되고 난 후에도 삶의 윤리성에 대한 마지노선으로 삼아 수없이 되돌아보고 또 되돌아보아 온 모습이다. 마치 피에로를 연기하는 마임의 한 토막을 보는 듯하다. 문제는 그 주인공이 나이며 허구가 아니라 실제라는 것이다. 그 삽화를 떠올리면 언제나 얼굴이 붉어진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마음이다.

신자유주의, 미국 모델 (출처 : 경향DB)


치욕감은 어떤 이에겐 자기 존재를 강하게 만드는 데 사용된다. 문학을 나의 ‘유일한 주인’으로 삼도록 만들고 오로지 그 길로 가도록 추동해준 삽화의 하나다. 내 경우가 그렇다는 말이다. 누구는 전혀 다른 그 무엇이 그의 인생에서 유일한 주인이 될 터이다. 자신의 길을 찾아 가지면 우왕좌왕하지 않게 되고 그러므로 강해질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사람들은 그것을 ‘정체성’이라고 부른다. 치욕으로부터 나를 지켜내는 방패요 명령으로부터 빠져나와 나를 드러내는 ‘존재의 나팔소리’라 할 수 있다. 불연속선의 반세기를 살아오면서 이만큼이라도 “나는 세상에 의해 훼손되지 않았다”라고 스스로 위로할 수 있는 근거가 그것이다.

자유주의 세계화가 살갗을 벗기고 피를 졸이는 세상에서 이것이 내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가치를 얻고 그에 의탁해 사는 일은 낙타를 타고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처럼 어렵다. 먹고살 만해도 때로 한없이 쓸쓸하고 때로 벼랑 끝을 걷는 것처럼 불안한 것은 한 존재로서의 고유성, 그것을 버렸거나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함께 걷되 혼자 걷고 혼자 걷되 함께 걷는 것이 인생이다. 고유한 꿈이 없다면 전체로서의 자유도 없다. 고유한 가치를 통해 글로벌 체제가 부추기는 욕망의 아우성으로부터 나를 지켜내는 것이야말로 참자유일 것이다. 그래서 늙어가는 요즘도 나는 자주 속으로 이렇게 부르짖곤 한다. “그 누구든, 그 무엇이든, 백묵으로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거기 서라고 명령하는 자에겐 결코 굴복하지 않을 거야!”

어쩐 일인지 최근엔 부쩍 더 현재진행형으로 그날의 삽화가 생각난다.


박범신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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