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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 나는 시골의 어느 여자 중·고교에서 ‘전임강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수업과 담임 등 업무에선 정규직 교사와 하나도 다르지 않지만 월급만은 정규직 교사의 반절 정도를 받는, 이를테면 비정규직 교사였다. 수업시수도 아주 많았는데, 더 힘든 것은 정규수업 이외 자율학습 감독이었다. 말만 ‘자율’일 뿐 모든 학생들이 자율학습비까지 강제적으로 따로 내면서, 교사와 함께 학교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내가 재직하고 있던 학교의 교장은 도내에서도 소문난 제왕적 교장이었다. 군부독재의 폭압적 권위가 하늘을 찌를 때였다. 모든 조직의 수장은 당연히 절대적 권력자로 군림했는데 학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침조회에서 교장이 국가시책을 소홀히 하는 교사를 나무랄 때 “선생놈들이…” 하는 거친 표현을 입에 담아도 항의하는 교사가 전혀 없을 정도였다. 교사들은 “가슴에 맷돌이 얹힌 것 같다”고 말했다.

당시 나는 예닐곱 명의 교사들과 특히 가까워서 퇴근 후면 후미진 막걸리집에서 자주 어울렸다. 자리는 늘 무거웠다. 화제는 교장에게 인격적 대우를 못 받는 것보다 자율학습비문제에 자주 머물렀다. 자율학습비는 전액 감독교사들에게 제공하도록 교육청 방침에 나와 있었는데 어떻게 된 노릇인지 교사들이 받는 수당은 학생들이 내는 자율학습비의 반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머지는 어디에 어떻게 쓰는지 오리무중이었다.

절대빈곤의 시대였다. 나 같은 총각선생은 그래도 괜찮았으나 아이들을 두셋씩 학교에 보내야 되는 늙은 교사들은 막걸리값도 변변히 내놓을 형편이 되지 않았다. 삶은 늘 캄캄했고 교사로서의 소신도 가질 수 없었다. 군부독재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것이 교과내용을 가르치는 것보다 더 중요하던 시절이었다. 교장은 반공과 개발의 전도사를 자임했다. 교육감으로까지 거론되는 힘 있는 교장에게 감히 문제제기를 할 대찬 교사는 없었다.

나는 그때 겨우 20대 중반이었다. 작가를 꿈꾸던 그 무렵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내성적인 청년이었지만 젊었으므로 순정한 영혼을 갖고 있었다. 그 순정이야말로 ‘불온’이요 ‘오욕’이었다. 예의 “선생놈들이…”로 시작된 교장의 추상같은 훈화가 끝난 다음 내가 불쑥 손을 들었다. 동료교사들의 쌓이고 쌓여온 울분에 밀려 거의 저절로 들려진 손이었다. 교장은 물론 수십명의 교사들의 눈길이 일제히 내게 쏠렸다. 발언권조차 없는 것으로 치부되던 ‘전임강사’가 손을 들고 일어났으니 미상불 특별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자율학습비에 대해 물었다. 식은땀이 났다. 자율학습비 용도가 불분명하니 이에 대해 설명해달라는 요지의 발언이었다.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든 꼴이었다. 교장의 얼굴은 노기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당신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했다고 간주한 교장이 “저놈 뭐얏!” 소리쳤고, 펜대인가 잉크스탠드인가 그런 것이 교무실 한가운데로 날아왔으며, 동시에 주위에 있던 몇몇 교사들이 나의 양팔을 붙잡아 복도로 끌고 나왔다.

교장실로 오라는 교장의 분부를 전달받은 것은 1교시 수업이 시작된 직후, ‘정규직 교사’의 꿈이 단번에 날아갔다는 걸 막 깨닫고 있을 때였다. 정규직 교사가 못 돼도 동료교사들이 정당하게 자율학습비를 받게 된다면 그것도 보람찬 결과가 아니겠는가 하고 나는 나를 위로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찾아간 내게 돌아온 것은 삿대질과 불호령뿐이었다. 교장은 “버르장머리가 없다”고 했다. ‘아비’와 같은 당신에게 불손하게 대드는 것은 교사의 자질문제만이 아니라 “가정교육”의 문제라는 지적이었다. “가정교육”에서 나의 혈기가 비정상적으로 터졌다. 나는 울분을 참지 못해 교장실 유리창을 깨뜨리기 시작했다. 난동이었다. 교장은 도망가고 서무과 직원들이 쫓아와 나를 붙잡았다. 양손은 피투성이였다. 경찰차가 들이닥쳤다. 나는 붙잡혀 폭력교사로 파출소까지 곧 압송됐다.

두 시간쯤 후에 교장이 파출소로 찾아왔다. 교장은 나를 방면시켜 중국집으로 데려가 요리를 사주며 회유했다. 교육감이 되는 게 꿈이었던 교장은 나를 파출소에서 연행해 가도록 조치한 후에야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교장은 젊은 혈기가 “좋다”고 나를 칭찬하면서 다음 학기엔 꼭 정식교사로 발령받게 힘써 줄 테니 그리 알라고 했다. “죄송합니다.” 나는 ‘아비’와 같은 교장에게 사과했다. 그 후 자율학습비가 제대로 잘 지급됐었던가. 그걸로 좌우간 사건은 봉합된 것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모든 선생들이 나를 기피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늘 함께 둘러앉아 울분을 나누었던 동료교사들이 나를 피하는데 나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정식교사의 꿈을 내박치면서까지 문제의 발언을 한 것은 오로지 그들의 울분을 차라리 젊은 내가 짊어져가자는 것이었는데, 칭찬받기는커녕 일제히 ‘왕따’시키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학교 안에선 물론 학교 밖에서조차 아무도 나를 상대하려 하지 않았다.

이듬해 나는 한 시골중학교로 정식 발령을 받았다. 교장은 어쨌든 당신의 약속을 지킨 셈이었다. 그러나 사랑했던 동료교사들로부터 버림받은 상처는 너무도 선연했다. 그런 어림에 어부지리처럼 얻은 정식교사직을 계속하는 일이 비굴하게 느껴졌다. 한 달 만에 정식교사직을 때려치우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생활은 고통스럽기 그지없었다. 고통스러운 굽이굽이마다 함께 막걸리잔을 기울이던 교사들이 자주 떠올랐다. 상처가 깊어서 적도 아군도 믿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들의 죄는 약하다는 것. 나하고 계속 친하게 지내다가 불이익을 당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정서적인 상처는 동료들에게서 받았으나 그들과 나를 이간질시킨 핵심은 교장의 나쁜 권력에 있었다는 걸 아는 데 오랜 세월이 걸렸다.

이런 권력에 국가개조를 맡기지 않았다


나쁜 권력은 공동체를 말하면서 기실은 그 구성원들을 권력으로 낱낱이 갈라놓는다. 지난 반세기 우리에게 생긴 패악의 정파주의, 지역주의, 세대주의 가름을 누가 만들었는가. 싸워야 할 것은 우리끼리의 싸움이 아니라 우리를 갈라놓는 나쁜 권력과의 싸움이다. ‘국가개조’를 한다는데 나쁜 권력의 카르텔이 해체되어 과연 정반합의 착한 융합에 이를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박범신 | 작가·상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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