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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대통령 선거를 전후한 즈음, 고등학교 2학년생이었던 나는 명동성당에서 친구들과 농성 중이었다. 1987년 민주화운동을 더는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없어서 친구들과 함께 ‘서울지역고등학생운동협의회’란 단체를 만들어 “공정한 대통령 선거와 교육민주화”를 주장하며 그해 12월 명동성당에 들어갔다. 농성을 준비하며 우리는 어설프게나마 죽음을 각오했었다. 87년 선거에서 그들이 패배한다면, 5월 광주 같은 일이 어디선가 또 일어나게 될 거로 생각했다. 그와 반대로 그들이 승리한다면 분노한 시민들이 들고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계엄령이나 최소한 위수령 같은 사태가 발생하리라 예측했다.

12월16일에 치러진 제13대 대통령선거 결과는 투표 유권자의 36.6%를 얻은 노태우 후보의 당선으로 끝났다. 1980년 5월 광주로부터 시작해 87년 6월항쟁과 7·8·9월 노동자대투쟁에 이르기까지 민주화운동이 추구했던 민주정부 수립은 결국 전두환과 함께 12·12군사쿠데타의 주역이었던 노태우의 대통령 당선으로 귀결되었다. 투표권도 없던 고등학생으로서 나에겐 평생 씻을 수 없는 좌절과 굴욕으로 남은 역사였다.

87년의 좌절을 경험했기에 2008년의 촛불집회와 2016~2017년 촛불집회에 아내와 아이의 손을 잡고 참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런 시위만으로 세상이 바뀔까, 저들이 이 목소리를 들을까 싶었다. 광화문 버스 장벽에 막혀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내내 가슴 답답했다. 그러나 아이와 촛불을 들고 광화문을 평화롭게 오가면서도 1987년의 경험이 있었기에 군부가 전면에 나설 것이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내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던 바로 그 시각, 기무사에서는 ‘전시 계엄 및 합수업무 수행방안’이라는 대책을 수립하고 있었다. 이 문건에 따르면, 기무사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이 기각될 경우 이에 불복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격화될 것으로 예측하여 위수령을 발령하고, 위수령 상황에서 군이 폭행을 당하거나 진압할 수단이 없다고 판단되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도록 계획했다. 그 뒤 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령 상황 아래 군이 정부부처·수사기관을 장악하고 언론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제하는 방안까지 구체적으로 마련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IT강국을 자부하는, 올림픽과 월드컵은 물론 6월항쟁을 치른 나라에서 ‘군부쿠데타’를 통해 권력 유지와 연장이 가능할 것이라 여기는 정치세력이 있었다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지난 정권들이 내보인 블랙리스트나 여러 정치공작을 보건대 불가능한 일만도 아니리라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해졌다. 기무사가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민을 상대로 계엄령을 추진한다는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 한편으로 시대착오적이며 우스꽝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각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성조기와 이스라엘기를 앞세운 시위대가 노동자의 죽음을 조롱하고 있으며, 직원들에게 단체로 회장 찬가를 부르게 하는 경영자가 경영수업 받는 자기 딸은 예쁘게 봐달라며 고개를 조아린다. 또한 난민에게 보내는 우리의 쌀쌀맞은 시선을 생각해보면 민주시민의 자부심은 섣부르다.

압축적 근대화의 역사를 살아낸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 중 하나가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다. 이것은 각기 다른 역사적 시간에 등장하는 요소가 동시대에 나타나는 현상을 의미한다. 서로 다른 요소들이 각축을 벌이며 사회의 상을 만들어내는 법이지만, 우리는 과거에 해결했어야 할 전근대적 요소들까지 살아남아 근대적 요소와 탈근대적 요소들과 함께 동시에 경합하는 중이다. 이런 것들이 바로 적폐의 내용이다. 과거 우리가 해결하지 못했던 과제들은 언제라도 망령처럼 되살아나 오늘 우리의 뒤통수를 칠 수 있다는 것을 기무사 문건은 잘 보여주고 있다.       

민주주의는 80년 5월 광주와 87년 6월항쟁, 2017년 대통령 탄핵 같은 극적인 사건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여러 곳에 스며있는 적폐청산이란 과제는 분배구조의 개선, 노동자 지위 향상, 여성과 소수자의 권리 보호 등 민중의 사회경제적 권리를 정치적으로 담아내는 일상의 민주주의가 없다면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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