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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비핵화 속도에 불만을 나타내는 사람들의 수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북·미 비핵화 회담 빠르기가 3단 기어로 놓고 가다 갑자기 1단 저속으로 변경됐다는 것이다. 이들은 젊은 독재자가 비핵화 변죽만 울리면서 ‘미 제국주의’ 지도자를 시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 눈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농락당하고 있다고 믿고 있음에 틀림없다.

오죽하면 한때 회자됐던 ‘믿되, 검증하라’(trust, but verify)가 아닌 이제는 ‘불신하고, 검증하라’(distrust, and verify)는 신문 사설까지 나왔을까. 심지어 김정은과 비핵화는 장례식장과 나이트클럽만큼이나 안 어울리는 단어라고 극단적으로 주장하는 이도 있다. 다분히 냉소적이다.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누가 애초에 비핵화 기대감을 한껏 부풀렸는지 책임 따위를 묻는 것은 모두 부질없는 짓이다. 상호 신뢰구축이 한반도의 비핵화를 추동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 6·12 싱가포르 공동성명의 ‘선의’가 퇴색한 것은 분명하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오른쪽)이 지난 7일 북한 평양 순안국제공항에서 출국 직전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왼쪽에서 두번째)과 악수를 하고 있다. 평양 _ AP연합뉴스

급기야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비핵화 로드맵을 갖고서 지난 6일부터 1박2일간 또다시 평양에 다녀왔다. 세 번째 방북이다. 하지만 폼페이오는 비핵화 시간표 합의는 고사하고 김정은도 만나지 못했다. 그나마 북한 내 미사일 엔진 실험시설 폐쇄에 대한 실무급 회담을 구성키로 합의한 게 진전이라면 진전이다. 청와대가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고 언급한 것 역시 이러한 맥락으로 해석됐다.

돌이켜보면 6·12 북·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의 언어는 가난했다. 최고 수뇌부가 최초로 대좌하여 70년 적대관계 종식의 서막을 알리는 역사성을 감안할 때 A4 두 장 분량의 합의문에 담긴 단어들은 종이의 두께보다 더 빈약했다. 비핵화가 덜 강조되었다고 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양국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끝내고 평화체제로 나아가자는 역사적 대전환을 알리는 공식문건인 공동성명에 서로에게 남겼던 상처에 대한 깊은 고뇌와 성찰 그리고 미래 비전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세부적인 내용을 담은 별도의 비밀 합의사항이 존재한다면(있기를 바란다) 총론으로서의 공동성명은 더욱 그랬어야 옳았다.

이제 트럼프 행정부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폐기’(CVID) 대신에 ‘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FFVD)를 브랜드화하기로 정한 것 같다. FFVD 전에는 ‘영구적이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PVID)도 있었다. 언어의 유희다. 비핵화가 이렇듯 외교적 수사로만 달성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김정은이 더 이상 꾸물대지 않고 약속대로 핵을 포기할 것으로 굳게 믿는다면 트럼프 역시 선제적으로 관계를 정상화하는 대담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조기 종전선언 가능성을 슬쩍 내비쳤던 트럼프가 아닌가.

마침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 12일 싱가포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4·27 판문점선언에서 합의한 대로 올해 종전을 선언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그러면서 종전선언을 비핵화와 평화협정 체결 등을 견인할 정치적 선언으로 규정했다. 다시 끈을 조여매고 잠시 주춤했던 비핵화 속도를 힘차게 견인해 나갈 태세다.

비핵화는 지금까지의 북한을 지우는 일이기도 하다. 지울 수 있다는 것은 다시 시작할 힘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비핵화의 매듭을 푸는 게 쉽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다만 이를 제때에 제대로 풀어야만 경화(硬化)된 북한의 동맥이 풀릴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비핵화 성공 여부가 시간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남·북·미 3국은 이제 달아날 수도, 숨을 수도, 멈출 수도 없는 상황이다.

비핵화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말이 아닌 직접 행동으로 보여줘야만 가능한 작업이다. 시설 동결, 신고 및 불능화, 검증 및 폐기 등은 과정이 복잡하고 험난할 뿐만 아니라 모든 요소가 실질적 이행조치들이다. 비핵화가 붕어빵 찍어내듯 단순한 작업이 아닌 이유다. 미·중 무역전쟁이라는 돌발 악재가 생기기는 했지만 오는 9월 유엔총회를 기회로 역사적인 종전선언이 이루어지도록 유관 당사국들이 마지막 힘을 쏟아야 한다. 그리하여 가을에는 한반도에 평화의 바람이 불게 해야 한다.

<이병철 | 평화협력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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