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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농사 마친 들판에 덩그러니 남은 볏짚은 숨바꼭질하기 좋은 장소다. 싹둑 잘린 볏논의 가지런한 빈터에서들 손야구를 즐겼는데, 고무공을 던지면 주먹으로 치는 야구였다. 공이 가볍다보니 투수는 바나나킥 못지않은 마구를 던질 수 있었지. 맨 바람에 볼이 빨개지도록 들에서 놀곤 했다. 그럼 볏짚을 둘러쳐 뚝딱 바람막이 ‘벽집’을 지었다. 볏짚을 태워 고구마를 구워먹기도 했다. 산으로 가면 숨을 만한 곳을 찾아 나뭇가지로 지붕을 엮고 비닐을 덮고, 낙엽을 주워 바닥을 깔았다. 두셋이 들어가면 무릎이 닿았는데 친구들과 지은 첫번째 집이었다. 모험심 강한 아이들은 저마다 비밀기지를 하나씩 두었다. 나는 예배당 뒤에 세례식을 베푸는 시멘트 욕조가 있었는데, 그곳에다 대나무를 썰어다가 엮고 지붕을 만들어 비밀기지로 썼다. 지금처럼 캠핑 텐트가 흔한 세상이 아니었으니 고급 천막은 그림의 떡이었다. 농사에 쓰다만 불투명 비닐 조각이면 충분히 비바람을 피할 수 있었다. 음반 일로 북유럽을 종종 가게 되는데, 아이들의 비밀기지로 쓰이는 트리하우스가 놀라웠다. 부모님과 같이 트리하우스를 지어본 아이들은 훗날 똑같이 제 자녀에게도 그 재미와 보람을 물려줄 듯싶었다.

교회 주변을 맴돌며 살다보니 어린 나이에 예배당 수리를 해봤다. 시멘트 블록으로 창고 건물도 겁 없이 지어보았다. 삼십대에 이 산골짜기 양지바른 터에 살림집을 짓기도 했다. 내 또래에선 이른 경험이었을 게다. 웬만한 목수보다 많은 공구를 가지고 있고, 해본 가락이 있어 덤벼든 일. 일복이 터져 알바로 ‘인테리어’도 돕곤 한다. 비밀기지를 만들던 기억을 떠올려보면 ‘일파만파’ 놀이가 커진 게다. 

호모 노마드. 유목하는 인간은 천막집을 잘 세울 줄 알아야 한다. 인연이 닿으면 자기 집도 지어볼 수 있길. 헐어진 장독간이라도 다시 세울 재주는 가져야지. 국방과 안보를 염려하는데, 비밀기지를 잘 짓는 아이들이 있는 한 무엇이 두려우랴. 아이들이 비밀기지 놀이는 않고 영어공부만 하니까 미국에서 방위비를 더 뜯어내려는 듯.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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