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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색 낙엽이 낙하 중이다. 이런 날엔 에디트 피아프의 샹송을 큰 볼륨으로 듣고 싶어라. 낙엽은 푸른 잎사귀의 죽음. 낙엽을 한 잎 주워 책갈피에 꽂아둔다. 최인호 샘의 글에서 본 기억. 봉쇄 수도원 트리피스에선 단 한마디 말만 할 수 있단다. “형제님. 죽음을 기억합시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 책갈피 낙엽에 적어두고 싶다. 죽음으로 멈춘 기억들은 남은 자의 몫이겠다.

오래전 월간 ‘샘터’에 몇 해 연재를 했었다. 그때 뵈온 동화작가 정채봉, 소설가 최인호, 영문학자 장영희, 사진작가 최민식, 수필가 피천득, 그리고 법정 스님과 류시화 시인까지 모두 시절 인연들이다. 가끔 엽서를 주고받았던 이해인 수녀님도 월간지 인연. 출판사 샘터에서 부탁해와 아포리즘 같은 책을 한권 낸 일도 있다.

책이 나온 날에 붉은 벽돌 건물 샘터 파랑새극장에서 티어라이너 밴드 동생들과 공연을 가지기도 했었지. 한창 싸돌아다니던 때라 지인들이 많았다. 뒤풀이에 돈을 꽤 많이 써야 했던 기억. 대학로엔 ‘학전’이란 극장도 있는데, 막걸리 냄새를 풍기고서 건널목을 지나던 김민기 아저씨를 뵙기도 했다. 그땐 감히 알은체를 못했다.

‘샘터’의 인연도 가물거리는 옛일이 되었다. 매달 변함없이 독자를 찾던 월간지가 시대가 변하여 기우뚱한다는 소식. 그러고 보니 녹색연합에서 펴내던 생태월간지 ‘작은 것이 아름답다’도 발간을 멈췄다. 창간호부터 녹색연합에 후원한다 셈 치고 매달 원고료 없는 긴 글을 주었지. 맑디맑은 수필들이 숨 쉬던 월간지들이 지상에서 힘겨워한다. 월간지들이 올근볼근 다투며 주름잡던 출판계는 옛 추억이 되었다. 지금은 괘꽝스러운 전자기기의 세상이다. 무슨 협회에 가입하거나 학연, 지연, 등단의 울타리가 아니면 작가들끼리 교류도 사실 거의 없다. 지면이 없으면 안면도 더는 없겠고, 두둥게둥실 흩어가는 구름떼가 되겠지. 홀가분하여 좋기도 하지만서도 문우 문형을 갖지 못하는 시절은 못내 아쉬울 게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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