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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는 어제 ‘인혁당 사건’과 관련해 “(무죄를 확정한 재심) 판결은 존중한다. 법적으로 그렇게 된 것은 저도 인정한다”고 말했다. 전날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지 않았느냐. 앞으로의 (역사적) 판단에 맡겨야 되지 않겠느냐”고 한 발언이 법치를 부정한다는 비판이 일자 한 발 물러선 것이다. 박 후보가 재심 판결을 존중한다고 밝힌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 한마디로 사태의 본질을 비켜갈 수는 없다. 박 후보는 인혁당 사건을 둘러싼 일련의 발언으로 역사·법치 인식의 민낯을 드러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박 후보가 앞서 “그 조직(인혁당)에 몸담았던 분들이 최근 여러 증언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까지 감안해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되지 않겠느냐”고 말한 대목이다. “인혁당 사건은 조작이 아니다”라는 일부 학자나 정치인의 주장을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이들이 주로 문제삼는 사건은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이며, 이번에 쟁점이 된 것은 1975년 사형이 선고·집행되고 2007년 무죄가 난 2차 인혁당 사건이다. 박 후보가 이러한 주장을 인용한 것이라면 논점 이탈이 된다.


박근혜 후보의 5·16 및 유신 관련 발언 (경향신문DB)


만에 하나 2차 인혁당 사건과 관련된 다른 증언이 있다 해도, 그것이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법정 밖의 주장은 법정에서 내린 결론을 탄핵할 수 없다. 2007년의 재심 판결이 취소되지 않는 한 2차 인혁당 사건을 규정하는 유일한 ‘사실’은 사건 관련자들이 무죄라는 것뿐이다. 박 후보의 인식대로라면, 어떤 사건의 당사자도 법원 판결에 승복할 이유가 없게 된다. ‘판결은 나왔지만, 관련자들의 다른 증언도 있으니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고 한다면 사법체계와 질서는 어찌 되겠는가.


우리는 박 후보의 인식체계에서 거듭 중대한 결함을 발견한다. 그는 대부분의 역사교과서가 군사쿠데타 또는 군사정변으로 표기하고 있는 5·16을 두고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대법원이 유신헌법에 기초한 긴급조치를 위헌으로 판결했음에도 “유신에 대한 평가는 역사의 몫, 국민의 몫”이라고 말한다. 역사적·법적으로 판단이 끝난 ‘사실’조차 그는 외면하고 있다. 


모든 소통의 전제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유리하든 불리하든 사실을 받아들일 때만 타자와의 대화가 가능해진다. 불리한 사실을 부정하거나 역사의 몫으로 미루는 것은 무책임하고 비이성적인 태도이다. 지동설의 시대에 천동설도 일리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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