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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에서 최순실씨에 맞먹는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이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이다. 왕실장 또는 기춘대원군으로 불린 그는 2013년 8월부터 2015년 2월까지 청와대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보좌했다. 최씨가 비선이라면 김 전 실장은 공식 라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제 열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국정조사 2차 청문회에서 박 대통령과 관련된 모든 의혹에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는 세월호 참사 당시 박 대통령이 머리 손질을 했다는 보도에 모르는 일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태반주사 등 각종 주사를 맞은 사실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 최씨를 만나거나 본 적도 없으며, 지난 10월 대통령의 연설문이 들어있는 최씨의 태블릿 PC 건이 언론에 보도된 뒤에야 최씨 존재를 알았다고 말했다. 나라가 큰 혼란에 빠지고 박 대통령이 탄핵당하기 직전이지만 비서실장으로서 책임감도 보이지 않았다. “부끄럽고 죄송하다”는 게 전부였다. 그의 발언대로라면 그는 청와대 허수아비였다. 무능하고 어리석다는 말을 듣더라도 형사처벌을 피하겠다는 속셈으로 보인다.

김 전 실장과 찰떡궁합을 과시했던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은 아예 청문회에 나오지도 않았다. 가족 모두가 일부러 집을 비워 국회가 보낸 등기우편과 동행명령장을 받지 않은 것이다. 당사자가 직접 받지 않으면 효력이 없다는 점을 악용했다. 검사 출신인 우 전 수석은 누구보다 엄정한 공권력 집행을 강조했던 사람이다. 그는 이미 게이트의 공범에 준하는 수사를 받고 있다. 그의 청와대 입성을 최씨가 막후에서 도왔다는 설도 있다. 그의 장모 김장자 삼남개발회장이 최씨·차은택씨 등과 골프를 친 사실도 확인됐다. 우 전 수석은 김 전 실장과 2014년 12월 ‘청와대 정윤회 문건 유출 사건’을 은폐·조작하고, 검찰의 수사 정보를 기업에 유출했다는 의심도 받고 있다.

이들이 재직했던 대통령비서실은 대통령의 직무를 보좌하기 위해 청와대에 설치된 국가기관이다. 정부 부처와 행정기관 등을 통해 국내외에서 발생한 일들을 시시각각으로 보고받고 필요한 조치들을 하달하는 민생과 국정의 컨트롤타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이 주도하는 비서실은 민생과 시민의 안전은 안중에 없었고 대신 국정을 빙자한 음모가 판을 쳤다. 김 전 실장 밑에서 우 전 수석의 전임으로 8개월간 일한 고 김영한 전 민정수석이 남긴 업무수첩 메모를 보면 기가 막힌다. 김 전 실장은 법원이 지나치게 강대하므로 견제수단 생길 때마다 길을 들여야 한다는 취지로 김 전 수석에게 지시한 정황이 담겨 있다.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는 양창수 대법관의 후임으로 호남 출신은 배제하고 검찰 몫 획득을 위해 양승태 대법원장 등과 교류할 것 등을 지시한 것으로 보이는 내용도 있다. 사실이라면 사법부 독립을 거스르는 행위이다.

야당 정치인에게 공작을 펼친 정황도 있다. 김 전 실장 지시에 따라 박 대통령을 모독한 장하나 의원을 검찰에 고발했다는 취지의 메모 등이 대표적이다. 헌법재판소 판결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세월호 관련 여론을 조작하려 한 의혹도 있다. 이 모든 내용에 대해 김 전 실장은 “그렇게 이야기한 일이 없다”며 부인으로 일관했다. 석고대죄해도 부족한 그가 국회 청문회에서 또 한 번 주권자를 능멸한 것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는 또 다른 차원의 국정농단이 대통령비서실에서 광범위하게 이뤄졌을 가능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박영수 특검은 강도 높은 수사를 통해 이들의 비위를 밝히고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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