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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산책자]알로하셔츠와 귤

opinionX 2019. 10. 21. 10:55

견딜 수 없이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인다. 딱히 서늘한 바람 부는 가을이어서가 아니다.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서도 혼란스러운 생각을 정리하고 차분해질 것만 같았다. 종종 여행을 다녔지만 그건 호기심이 앞선 설레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충동은 그런 여행 감각과 또 달랐다. 일상의 루틴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뭔가 하루하루 구멍이 생기는 기분이었다.

일어나자마자 침실에 들여놓은 시집 책장에 손을 뻗어 아무 시집을 펼쳐 한 편 읽는 일, 절대로 거르지 않는 아침 식사, 출근하면 컴퓨터를 열기 전에 나무와 고양이의 동태를 살피는 일, 퇴근하기 전 사무실 골목을 기웃거리기 등 업무의 과중에 상관없이 반복되는 행위가 삶에 힘을 실어준다고 믿었는데 시큰둥해진 것이다.

떠날 수 없을 때 대체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했다. 전시회 관람과 영화관에 숨어들어가는 일. 현실과 다른 세계로 가는 통로를 거치면 기운이 회복되겠지.

전시를 찾아다니며 직업병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전시 벽면의 문장 타이포를 유심히 보거나 작품의 배열, 관람 동선도 내가 만드는 책 편집과 연결되었다. 일 생각에 빠져서 현실의 답답함을 잊을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그러다가 ‘알로하셔츠전’이라는 독특한 전시를 보았다.

미국 서부의 작은 도시 포틀랜드에서 2년, 하와이에서 2년을 산 이우일·선현경 만화가 부부가 서울로 돌아와 여는 전시는 뜻밖에도 작업한 작품이 아니라 현지에서 그러모은 오래된 알로하셔츠를 내건 것이다. 꽤 오래전 신혼여행으로 1년간 바깥세상을 다녀온 커플이니 짐작은 했지만, 그 후에도 이들은 출장도, 단순한 여행도 아닌 낯선 곳에서 ‘눌러앉아 살기’를 실천했다.

“나는 늘 ‘익숙한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원했다. 왜 나는 자꾸만 낯선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것일까. 이유가 특별히 없다면 그 자체가 바로 목적이 아닐까. 어쩌면 새로움과 낯섦을 찾아 헤매는 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목적일지 모른다”라고 <랜, 무엇을 하든 어디로 가든 우린>에서 이 작가는 고백했다. 창작자인 이들에게 잘 모르는 곳, 낯선 경험이 소중하다는 것을 이해한다.

전시장에서 마주친 알로하셔츠들은 놀라울 만큼 다양하고 독특한 문양이 많았다. 작가가 모아들인 것이니 프린트된 그림이며 포인트며 점잖지 않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신선하고 재밌었다. 알로하셔츠에는 하와이 주민들의 예술 감각과 문화가 그대로 드러났다. 전시장에서 구입할 수 있어 마음에 드는 두 장을 선택했다. 당장 걸치고 싶을 정도로 화려한 색감에 끌렸다. 반팔 알로하셔츠를 어떻게 입어야 할지 홀로 패션쇼를 벌였다. 가을 긴팔 옷 위에 겹쳐 입은 알로하셔츠는 색달랐다.

거울 앞에서 옷을 겹쳐 입으며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발견하고 내가 왜 떠나고 싶었던가 이유를 알았다. 이 장난기를 잠시 잃었던 것이다. 경직되고 유머 없는 날들 속에서 숨이 막혔던 것이다. 생업의 긴장감에 마모되는 곳이 나올 만한 시기였다.

그날 밤 보랏빛 책을 펼쳤다. 얼른 읽고 싶어도 펼쳐볼 용기가 나지 않아 망설였던 허수경 시인의 유고집 <가기 전에 쓰는 글들>을.

“귤 한 알./ 인공적으로 연명하는 나에게/ 귤은 먹을 수 없는 것이지만/ 나는 그 작은 귤의 껍질을 깠다./ 코로 가져갔다./ 사계절이, 콧가를 스치며 지나갔다/ 향기만이/ 향기만이/ 그게 삶이라는 듯.” 시인 듯 삶인 듯 처연하고 아름다운 글을 읽고 코를 벌름거렸다. 본능적으로 향을 맡아보겠다는 자세였다.

답답하다고 여기는 날들도, 그것이 향기일지 악취일지 알 수 없으나 어떤 냄새로 분명 남을 것이다.

이우일·선현경 부부가 돌아온 소감은 담백했다. “익숙한 곳에서 멀어질 때마다 우주에서 지구를 보는 것처럼 내가, 우리가 작아졌다. 그렇게 작아질 때마다 익숙한 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달았다.”

돌아온 이들은 익숙한 것의 가치를 말한다. 돌아올 수 없이 멀리 떠난 시인은 떠나기 전 자신에게 아직 남아 있는 말로, 자신에게 많은 것을 던져준 세계와 사람들에게 닿고 싶어 했다.

나도 언젠가 떠날 것이다. 담백한 소감조차 밝힐 일 없는 곳으로. 그때 일상도 멈출 거라고 생각하니 떠나고 싶은 충동으로 안달복달하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여행을 가지 않아도 여행감은 필요하다. 지금 이 순간, 이 날들도 콧가를 스치는 향기가 될 수 있을 테니. 오늘을 잘 살자.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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