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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설리(본명 최진리)가 하늘나라로 간 이후, 나도 왠지 모를 우울감과 슬픔에 시달렸다. 좋아했던 한 연예인이 이 세상을 등졌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여성들이 느끼는 불안과 고통의 원인에 무관심한 세상 때문이기도 하다. 당당한 행동과 밝은 표정 뒤에 감추어야 했을 두려움과 외로움, 아픔과 절망감에 통감하는 여성들의 마음에 애도의 강물이 흐르는 사이 악플과 언론으로 주범의 과녁을 바꿔가며 세상은 지금도 설왕설래 중이다.

그렇다면 진심으로 책임을 느껴야 할 주체는 누구인가. 얼굴 없는 악플이나 신체 없는 언론사인가, 댓글을 작성하고 기사를 쓰고 프로그램을 만들고 소비하는 사람들인가.

가수 겸 배우 설리. 연합뉴스

‘연예인’의 사생활에 대한 지나친 관심에 더해 ‘여성’에 대한 심오한 편견을 장착하고, ‘여성+연예인’의 취약성을 노린 무차별적 공격을 감행한 자들. 연예인이 사용하는 차량과 거주지, 자주 가는 식당과 옷집에서부터, 누구와 사귀는지 결혼했는지 이혼했는지 등 가장 사적인 영역까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살이 빠졌네, 쪘네, 얼굴이 예뻐졌네, 성형했네, 옷차림이 어떻네, 몸매와 얼굴 품평을 낙으로 삼고, 조금만 예상을 벗어나는 행동을 하면 ‘이상한’ 여자로 취급해 가차 없이 비난하거나 폄훼하고 조롱하고 공격하는 이들. 남자 연예인이 하면 소신발언이라 칭송하다가도, 여자 연예인이 하면 관심종자라 비난하거나 ‘페미니스트’라고 태그 붙여 집요하게 송곳을 꽂아댔던 이들. 여성을 여전히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인형이거나 눈요깃거리, 성적 만족의 도구 정도로 보는 자들. 모두 설리를 죽음으로 몰아간 주범들이다.

여성 연예인들의 삶을 도마에 올려놓고 부위별로 나누어 품평회를 일삼던 TV 연예오락 프로그램들을 기획하고 만드는 사람들. 파파라치처럼 사생활 꽁무니나 쫓고 소셜미디어 계정 하나하나를 기사화해 아니면 말고 식의 ‘의혹’을 제기하고, 특정 행동을 ‘페미니스트’ ‘논란’이라 규정해 공격을 부추긴 기자들. 여성의 피해에 공감하는 기사를 멀쩡히 쓰는 척하다 자신들만의 단톡방에선 그 고통의 가장 내밀한 부분마저 희롱거리로 전시하거나 오락거리로 소비하고 어떠한 제재나 처벌도 받지 않는 자들. 

연예인의 사망 소식에 집 앞과 빈소에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진을 치고, 악플러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던 사진들을 애도랍시고 끄집어내어 다시 망자의 명예를 물어뜯는 이들. 악플을 기사화해 악플을 유도하고, 상처를 팔아 다시 상처를 입히고, 스스로 만든 논란에 기름을 부어 논란을 기정사실화하며, 한 여성의 죽음을 이용해 다른 여성의 사회적 죽음을 유발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고 기생하는 이들이 또 다른 주범이다.

나는 의심한다. 온라인에 ‘설리 사망’ 보고서를 퍼트린 대한민국 공무원은 이들과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인가. 여성 연예인들을 성적 착취의 대상, 돈벌이용 상품, 남성연대의 도구 정도로 생각했던 그 검사, 기획사 대표, 언론사 대표는 이들과 전혀 다른 인간들일까. 사람의 실제 모습을 모방한 성인용 인형(소위 리얼돌)을 국감 현장에 들고나와 “산업화를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 국회의원은 또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인가. 아동 음란물 사이트를 만들고 운영하고 다운로드로 돈을 버는 사람들, 체포된 성범죄자를 불기소하거나 기소중지하거나 집행유예로 선처를 베푸는 사람들은 완전히 별개의 인간들인가. 불법촬영물을 찍고 올리고 거래하고 다운받고 낄낄거리며 소비하는 남자들은 또 완전히 무관한 이들인가. 미성년자에게 전화번호를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거절하자 ‘탈락’이라 과감히 말하더니, 논란이 되자 궁색한 변명으로 일관하는 남자 연예인과 제작진은 또 완전히 다른 사람인가.

이들은 어쩌면 젊고 재기발랄한 한 여성의 데이트강간 사건을 악의적으로 왜곡해 보도하고, 출신배경을 캐서 인신공격하며, 온갖 외모 품평과 추문을 만들어 ‘방종한’ 여자로 몰아 결국 사회적으로 매장한 100년 전 이 땅의 언론 및 남성 문인들과 같은 사람들은 아닐까. 조선 최초의 여성 근대 시인이자 소설가, 언론인, 영화배우, 연극배우였던 김명순은 그렇게 사회적·실존적 죽음을 맞았고, 이제야 그의 이름과 작품이 서서히 복권되고 있다.

우리가 최진리의 용기 있는 행동과 죽음의 배경을 마음을 다해 기억하고 기록해야 할 이유는 쓰레기더미 같은 악플과 기사만이 역사로 남아 현재 이 땅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이 다시 왜곡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목숨을 다해 소리친 이야기가 지워지고 여성의 죽음을 생산하는 세상의 ‘진리’가 단 하나의 ‘진실’로 남아선 안되기 때문이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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