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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소설가 셔우드 앤더슨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다. “죽음이 아니라, 삶이야말로 위대한 모험이다.” 어릴 적 그는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여기저기를 떠도는 삶을 살았다. 페인트 공장을 경영해서 성공을 거둔 그는 어느 날 뜻밖의 결정을 내리게 된다. 사업을 그만두고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편한 생활을 등지고 늦깎이 작가의 길로 들어선 그에게는 하루하루가 모험이었을 것이다. 세간에 가장 많이 알려진 연작 단편집 <와인즈버그, 오하이오>에 실린 단편 ‘탠디’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내가 중독된 건 술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또 다른 게 있었죠. 나는 사랑을 하는 사람인데, 사랑할 내 것을 찾지 못했어요. 제 말뜻을 알아들으실지 모르겠지만, 그건 대단히 중요한 이야깁니다.” 그는 이미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고 이야기에 중독되어 있었던 것이다.
복막염으로 갑작스러운 사망에 이를 때까지 그의 모험은 계속됐다. 삶이라는 ‘형식’에 모험이라는 ‘내용’을 담는 일은 다름 아닌 글쓰기를 통해 구체화되었다. 진득하게 관찰하는 태도로 인물들을 구성하고 그것을 시대적 상황에 녹여냄으로써 그는 고유한 이야기를 갖게 되었던 셈이다. 자기만의 형식에 자기만의 내용을 담기로, 안정적인 삶을 박차고 나가 모험에 뛰어들기로 마음먹지 않았다면 이야기는 분명 다른 방식으로 쓰였을 것이다.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은 윌리엄 포크너와 어니스트 헤밍웨이, 아모스 오즈는 오늘날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는 비단 특정 인물에 국한된 얘기는 아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무수히 많은 형식과 내용을 접한다. 어떤 경우, 이 둘은 자연스럽게 어울려 보고만 있어도 절로 웃음이 나온다. 머그잔에 담긴 커피, 유리병에 꽂혀 있는 꽃, 책장들 사이에 있는 책갈피처럼 익숙해서 안정감을 가져다주는 풍경이 그렇다. 또한 우리는 신뢰 가는 배우의 명연기, 가창력이 풍부한 가수의 라이브 공연, 좋아하는 작가가 쓴 신작 소설처럼 사람이라는 형식과 그 사람이 만들어내는 내용이 맞아떨어질 때 환호한다.
얼마 전 국회에서 있었던 필리버스터는 형식과 내용이 절묘하게 들어맞은 경우다. 그것은 ‘정치인’이라는 형식에 ‘정치’라는 내용이 어떻게 접목될 수 있는지를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일이었다. 정치에 기대와 신뢰를 저버린 사람들의 이목을 잡아끈 것은 무제한 토론이라는 형식과 그 형식을 십분 활용해서 자기만의 내용을 담아 풀어낸 정치인들의 이야기였다. 수 시간부터 십수 시간 동안 화장실에도 가지 않고 테러방지법을 비롯해 인권을 둘러싼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정치인들을 보고,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지금껏 그토록 원했던 것은 이런 내용이 아니었을까. 선거철에만 반짝 나타나 노동자와 소상공인들의 손을 잡는 가식적인 사람 말고, 독자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 자기 할 말이 있는 사람, 자기만의 절실한 내용이 있는 사람을 바랐던 것이다.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점에 환호했고, 아직은 이 사회에 기대할 것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안도하기도 했다.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테러방지법 저지를 위한 필리버스터를 진행하고 있다. _경향DB
그뿐만이 아니다. 장장 192시간 동안 서른아홉명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이 이렇게나 똑똑하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고 용어 자체만으로는 더없이 완전해 보였던 ‘테러방지법’의 속내를 면밀히 들여다볼 수도 있게 되었다. 필리버스터 영상을 SNS상에 공유하거나 웹툰과 동영상 등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 배포하면서, 스스로의 형식에 대해 고민하고 거기에 부합하는 내용을 담으려고 기지를 발휘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자리에 앉아 말끝마다 어깃장을 놓고 핏대만 높이는 여당 의원들을 향해 “빈 수레가 요란하다”라고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설득은 볼륨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내용이 없는 큰소리는 폭력일 뿐이라는 사실은 점점 생생해졌다. 필리버스터가 맥없이 막을 내렸을 때 우리가 분노한 것도 내용과 형식의 괴리 때문이었다. 테러방지법 직권 상정 반대라는 내용이 죽 이어지지 않고 내부적 합의 없이 갑자기 막을 내리고 만 형식에 개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필리버스터는 토론과 합의가 얼마나 중요한지, 민주주의의 본질이 무엇인지 절절히 깨달을 수 있는 경험을 선사했다.
경험은 형식이나 내용 하나만 가지고 완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만의 내용,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구축되고 그것이 발현될 수 있는 형식이 뒷받침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필리버스터에서 우리가 본 것은 희망이었다. 드라마였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될 현대사였다.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 행위’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목도한 것이다. 4월 총선이 다가오고 있다. 투표는 우리가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는 기본적이면서도 적극적인 형식이다. 다음 국면의 내용이 투표라는 형식을 통해 발현될 것이다. 우리가 희망하거나 분노했다면 그에 상응하는 이야기가 펼쳐져야 한다. 이 작은 ‘모험’이 어쩌면 삶이라는 형식을 조금 위대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오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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