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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에 필요하다는 스펙의 가짓수는 늘어나기만 하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한동안은 학벌, 학점, 토익, 어학연수, 자격증을 합쳐 ‘5대 스펙’이라 일컫더니, 요새는 공모전 수상경력, 인턴 경험, 봉사활동을 더해 ‘8대 스펙’을 이야기한다. 여기에 성형수술까지 포함시켜 ‘취업 9종 세트’라 부르기도 한다니 과연 이 목록의 끝은 어디일까 궁금해진다.

이 스펙에 다음 하나를 추가한다면 ‘인성’이 그 이름을 올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태도나 인성이 중요하다는 건 과거에도 수도 없이 이야기되어 왔던 바다. 하지만 이를 굳이 계측하거나 매뉴얼화하려는 움직임은 적었다. 성격은 자신의 타고난 기질의 바탕 위에, 성장하며 자연스럽게 경험한 요소들이 포개진 어떤 것, 일종의 암묵지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기업은 각종 인성검사를 개인의 평가에 활용하기 시작했고, 때로는 이 결과에 따라 당락 여부가 좌우되는 일도 벌어졌다. 인성 역시 수치화되어 엄연한 평가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취업준비생들은 인성검사에서 ‘이상’으로 분류되지 않기 위한 팁을 공유하기도 했고, 아직은 극히 일부의 얘기겠지만 이를 대비하기 위한 별도의 컨설팅, 심지어는 ‘일관된 인성검사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최면 교육’을 받는 사례까지도 등장했다.

이 문제를 큰 그림으로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나름의 배경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아동을 대상으로 한 여러 연구결과들을 살펴보면, 성인기에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는 지능지수(IQ)로 측정되는 인지적 역량보다 호기심, 사회성, 자기조절 등의 비인지적 역량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난다. 아동기 초기에 정책적인 투자를 해야 한다면, 인지 능력 향상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비인지 기술’ 또는 ‘소프트 스킬’을 키우는 데 강조점을 두는 게 맞다는 쪽으로 정리되고 있는 것이다.

육아서들도 발 빠르게 이에 호응하고 있다. 최근 육아서의 중요한 트렌드 중의 하나는 자존감, 정서를 넘어, 성격의 힘을 거론하는 것이다. 특히 긍정심리학의 연구 성과들을 바탕으로 특정 영역의 성격을 강화해보자는 흐름이 눈에 띈다. 이제 성격은 오랜 시간에 걸쳐 자연스럽게 키워가는 무언가가 아니라, 노력을 기울여 집중적으로 배양해야 하는 것으로 규정되기 시작했다.


인성 프로그램이 다루는 성격의 영역이 도덕적 차원을 넘어 성과적 차원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아이는 어떻게 성공하는가>를 쓴 폴 터프는 아이들의 성공에 영향을 미치는 성격 강점(character strength)으로 근성, 자제력, 열정, 사회지능, 감사하는 마음, 낙관적 성격, 호기심 등 7가지를 꼽았다. 어디에도 정직, 인내, 배려와 같은 도덕적 성격은 언급되고 있지 않다. ‘좋은 친구’, ‘착한 사람’으로 이웃과 더불어 잘 살아가는 것보다 성과를 내는 특정 성격을 갖춘 인재가 되는 게 더 중요한 목표가 되었다. 성격 강점 자체가 하나의 도구가 된 것이다.

성격 특질 가운데서 특히 근성이 부각되고 있다는 점 역시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저성장의 시대, 기업이 요구하는 인재는 똑똑하게 일을 잘하면서도 잘 버티는 인재다. 회사가 힘들어도 뚝심 있게 잘 견디고, 긍정적으로 대처할 수 있어야 좋은 인재로 인정받는다. 이를 어려서부터 키워주는 프로그램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 효과성과 무관하게 하나의 신호다. 자본주의는 이제 어린이의 인격까지 수치화, 자본화하기에 이른 것이다.

사실상 좋은 태도는 좋은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태도를 말하려면 그 태도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도 함께 봐야 한다. <능력주의는 허구다>에서 스티븐 맥나미와 로버트 밀러 주니어 교수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태도를 갖출 수 있는 기회조차도 차별적으로 주어진다고 지적한 바 있다. 품행, 매너, 타인에게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 등 즉 사람들이 ‘태도’ 또는 ‘인성’으로 해석하는 것에는 ‘자라온 환경’이 반영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긍정할 수 없는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긍정이 요구되는 이들이 과연 누구인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풍부한 지지 체계 속에 있는 이들에게는 성격 강점의 효용이 그다지 높지 않다. 어려움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더 강력하게 요구되는 것, 그것이 바로 ‘인성’이다. 이겨내야 할 조건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다독이며 꿋꿋하게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청년들을 볼 때마다 박완서 선생님의 소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아무렇지 않지 않은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면 그게 얼마나 눈물겨운 노력의 결과였는지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으시죠.”


김성찬 | 소아청소년정신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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