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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물로 도착한 새해 달력이 한 해의 마감을 알려준다. 어릴 적, 퇴근하시는 아버님이 돌돌 말린 달력을 건네주시면 그 서늘한 지면 속 새로운 그림들을 펼쳐보며 즐거워하곤 했다. 종이 달력의 쓰임새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절기별로 농사일을 알려주던 오랜 전통을 이어서 안전 달력, 복지 달력 등 기능성 달력들이 제작되고 팬덤을 겨냥한 굿즈 달력도 인기를 얻고 있다. 새롭게 단장한 달력을 받아들고 그 질감을 손으로 느끼며 한 장 한 장 넘겨보는 맛은 여전하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달력이 반가운 것은 새로운 한 해를 선물로 받은 느낌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흐르는 세월이 누구에게나 반가운 것은 아니다. 소식은 “늙어갈수록 새 달력 보기가 두렵다” 했고, 두보도 객지에서 맞은 서른아홉의 마지막 날, 저녁 해를 바라보며 실컷 취해서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을 토로했다. 그런데 노수신은 이들을 인용한 시에서 자신은 오히려 시각 알리는 북을 더 자주 쳐서 정월 초하루가 속히 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만사형통의 새해가 빨리 열리기 바라는 마음이 이토록 간절했던 것은, 그만큼 그가 딛고 있던 현실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옥황상제께 부탁해서 달력을 1만 년에 한 번씩만 바꾸게 하면 어떨까. 시인 어무적은 새 달력을 보며 이런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봄꽃 피는 데 천 년, 가을 달 차는 데 천 년씩 걸린다면, 요임금 순임금의 얼굴도 꽃다울 테고 주공 공자의 머리도 검을 테니, 그들이 흙 계단에 앉아 바른 정치를 위해 갑론을박하고 살구나무 뜨락에서 글 읽고 토론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세상이라면 그저 북두칠성 국자 삼아 창해의 술을 퍼다가 만민이 취해서 태평성대를 노래하면 될 것이니, 그 얼마나 좋을까.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상상이다. 하지만 그가 연산군 시절의 노비 출신 시인이었음을 고려한다면, 얼마나 깊은 고통에서 길어 올린 꿈일지 조금은 짐작된다.
헌 달력을 버리듯이 잊고 싶은 한 해를 훌훌 털어버리고 새 달력을 펼치듯이 조화로운 세상이 펼쳐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부질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바뀌어야 할 것들과 이루어져야 할 것들을 또박또박 적어본다. 이 계절에는 한 번쯤 그래도 되지 않을까. 시간의 흐름을 수치화하는 것은 이런 성찰과 소망의 기회를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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