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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차는 몸의 기름기를 씻어 내고 막힌 장기를 풀어준다고 알려져 있다. 가슴이 답답하고 열이 날 때 차를 마시면 안정되는 효과가 있어서 많은 이들이 습관적으로 차를 즐기곤 했다. 하지만 차가 지닌 독한 성질에 대한 경계도 일찍부터 있었다. 차는 자기도 모르게 서서히 몸을 상하게 하므로 그 이로움은 잠깐이고 해로움은 평생을 간다는 말도 있을 정도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어떤 행인이 길을 가다가 차 마시는 사람을 보고 말했다. “차는 원기를 손상하니 마셔서는 안되오.” 그러나 차 마시던 사람은 껄껄 웃고는 계속 차를 마셨다. 자신의 말이 무시되자 화가 난 행인이 마을 사람들에게 다니며 외쳤다. “잘 보시오. 저 사람은 이제 머지않아 병들게 될 것이오.” 그러나 그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더 건강해질 뿐이었다. 차를 즐기되 잘 조절할 줄 알아서, 반드시 배불리 먹은 뒤에만 차를 마셨기 때문이다.
강희맹은 그림에 매우 능하기로 이름이 났다. 그런 그에게, 그림은 잘 그려봐야 천시받을 뿐이고 경학 공부에 방해가 되니 그만두라고 권하는 편지를 보내온 이가 있었다. 인성 수양과 경세제민을 위한 공부 이외에는 모두 완물상지(玩物喪志)로 간주해 경계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강희맹으로서는 자신의 그림 그리는 취미를 변호할 필요가 있었다. 그 변호의 논리 가운데 하나로 가져온 것이 위의 이야기이다. 속이 비어 있을 때는 차가 해롭지만 기름진 음식을 배불리 먹었을 때는 더없이 좋은 것이 차인데, 이를 모르고 일률적으로 권면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도덕의 기본을 세우면서 즐기기만 한다면, 예술이야말로 군자가 노닐 지향이라는 논리다.
“책선(責善)은 벗 사이의 도리다”라는 말은 본디 부모 자식 사이에는 책선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나왔다. 가까운 벗이라 해도 관계가 멀어지거나 절교할 각오로 하는 것이 책선이니, 끊을 수 없는 천륜의 관계에서는 애초에 하지 말라는 뜻이다. 더구나 상대의 사정과 속내를 깊이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의 지식과 경험만을 내세워 섣불리 건네는 충고는 어리석고 위험하다. 인터넷의 각종 매체에 수위를 넘어선 단죄의 댓글이 난무하고 있다. 말을 쉽게 던질 수 있는 환경일수록 더 신중에 신중을 거듭할 일이다. 사람 사이에 끝까지 익명일 수 있는 공간은 없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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