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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1. “이건 기생충이 맞습니다.” 내 말에 A는 당황해했다. “선생님, 다시 한번만 봐주시면 안될까요? 아무리 봐도 이건…” 난 A의 말을 잘랐다. “이것 봐요. 기생충은 제가 님보다 더 잘 알잖아요? 제가 맞다면 맞는 겁니다.” A는 알았다고 하며 내 연구실을 나갔다. 그로부터 5년 뒤, 난 학술지에서 ‘기생충과 구별해야 할 음식물들’이란 기고문을 봤다. 소화가 잘 안 되는 식물의 줄기가 대변으로 나올 경우 기생충과 헷갈릴 수 있다는 내용이었는데, 내가 놀란 건 사진에 나온 콩나물이 A가 내게 가져온 물체와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어렵사리 알아본 결과 내 진단이 A에게 미친 영향은 상상 이상이었다. 기생충에 감염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회사는 A를 해고했다. 재취업을 하려고 해도 기생충 감염 전력은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러는 사이 A의 가정은 무너졌고, 그의 자녀들도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가정 2. “며칠 정도 걸리겠습니까?”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가 무서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최대한 빨리 준비하겠습니다.” 자신을 국정원 직원이라고 밝힌 그 사내는 내게 싱싱한 회충알 1만개를 구해달라고 했다. 말은 안했지만 그리 좋은 목적에 쓰일 것 같진 않았다. 싫다는 의사를 내비쳤지만, 협조하지 않으면 승진에 지장이 있다는 말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3개월 뒤, 매스컴은 B를 비롯한 몇몇 반정부인사들이 다량의 회충에 감염됐다고 보도했다. 이와 더불어 진보인사들의 위생관이 도마에 올랐다. 차기 대선후보로 거론됐던 B였지만, 그는 몇 달간 격리된 채 치료를 받는다는 후속기사를 마지막으로 사람들로부터 잊혀졌다.

물론 이건 가상의 시나리오다. 회충은 이제 우리 사회에 없다시피 하며, 있다 해도 약 한 알로 치료되니 그리 신경 쓸 필요가 없다. 하지만 저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많은 이들이 나를 비난할 것이다. 나의 실수에서 비롯된 첫 번째 사례라도 욕을 먹어야 마땅하지만, 두 번째 사례라면 욕을 먹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교수 자리에서 잘리고, 법적으로도 처벌을 받아야 한다. 우리 사회가 전문가에게 기득권의 삶을 보장하는 것은 우리나라를 더 좋게 만드는 데 자신의 지식을 써달라는 당부의 일환이다. 거기엔 전문가들이 최소한 사적인 이익을 위해 지식을 남용하진 않을 거라는 믿음도 담겨 있다. 전문가들의 범죄가 일반인의 그것보다 훨씬 더 엄중하게 처벌받아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사법부의 만행을 다룬 팟캐스트 <이이제이>는 충격 그 자체였다. <이이제이>에 출연한 진실탐사그룹 ‘셜록’의 박상규 기자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비롯해 그 밑에 있는 판사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어떤 짓을 벌였는지를 고발한다. 한 사건만 보자. 좌우익 대립이 치열했던 1949년, 대구 10월 사건이 일어나자 당시 경찰은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 잡아들였는데,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정재식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남편이 걱정된 아내 이외식씨는 첫돌이 막 지난 ‘도곤이’를 등에 업고 20리 길을 걸어 경찰서에 찾아간다. 제발 남편을 보게 해달라고 조르자 경찰은 수감된 사람들이 골짜기로 끌려갔다고 말해준다. 시쳇더미들 사이에서 아내는 죽어있는 남편을 찾고 망연자실한다. 억울한 죽음이지만, 국가에 항의조차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외식은 빨갱이의 아내라며 가족은 물론 마을에서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 이외식이 자식을 버리고 도망간 것은 그런 측면에서 이해가 된다. 그녀 등에 업혀있던 정도곤씨는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여기저기서 막노동을 하며 살았다. 2009년, 과거사위원회는 절차도 없이 민간인을 살해한 그 사건이 국가의 잘못임을 인정했다. 1심 판결은 아내 이외식에게 3억3000만원, 아들 정도곤에게 2억6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 돈이 잃어버린 50년을 되돌려주기엔 턱없이 적지만, 어이없게도 국가는 항소했다. 2심을 진행할 당시 사법부의 수장은 양승태였다. 손해배상금은 대폭 삭감돼, 이외식 8800만원, 정도곤 약 5000만원이 됐다. 국가는 이마저도 주지 않겠다고 상고했다. 그리고 대법원은 정도곤씨의 배상금을 말도 안되는 이유로 주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나중에 밝혀졌다.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문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대법원은)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최대한 노력해왔다. 부당하거나 지나친 국가배상을 제한하고 그 요건을 정립했다.” 소위 재판거래 의혹, 즉 양승태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내가 이렇게 국가 돈을 절약해 주고 있으니 내 요구도 좀 들어달라’며 꼬리를 흔든 것이다. 이 파렴치한 행각이 드러난 뒤에도 대법관들은 사죄하기는커녕 의혹 자체를 부인했다. 양승태는 “법과 양심에 어긋난 재판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래도 이들에게 기득권의 대우를 해줘야 할까? 이들에게 보내는 존경심을 이제 거두자. 그리고 최저임금인 시간당 8350원을 주자. 신뢰를 저버린 전문가에겐 그것도 아깝지만 말이다.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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