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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른 것이 아니라 오로지. 2, 그 이상은 아니지만 그 정도는.’

‘다만’이라는 부사에 대한 설명이다. 일상생활에서 그렇게 자주 쓰는 단어도 아니고, 뜻을 보니까 무슨 말인지 더 헷갈리는데, 그럼에도 우리가 이 단어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다만’이 전혀 연결이 되지 않는 두 문장을 이어주는 데 놀라운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강씨(32·남)는 올해 1월7일 오전 2시20분께 제주 시내 한 마트 맞은편 도로에서 택시를 기다리던 피해자 A씨(58·여)에게 다가가 갑자기 욕설을 하며 주먹을 휘두른 혐의를 받고 있다. 그는 피해자의 옷과 머리채를 잡아 길바닥에 넘어뜨린 후에도 얼굴과 몸을 수차례 주먹으로 치고 발로 걷어차 코뼈를 부러뜨린 것으로 조사됐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강씨는 피해자인 A씨와 전혀 알지 못하는 관계였다. 그런 강씨가 환갑에 가까운 여성에게 막무가내로 폭력을 저질러 코뼈를 부러뜨린 것은 정상 참작의 여지가 없다. 게다가 강씨에게는 비슷한 범죄 전력까지 있다. 이런 사람이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는 건 그 자체로 사회에 대한 위협이 될 수 있으니, 엄격한 처벌이 필요할 터였다. 송 판사 역시 “죄질이 매우 나쁘다”며 “엄중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쯤 되면 ‘징역 3년에 처한다’ 정도는 돼야 문장 흐름이 자연스러울 텐데, 송 판사가 내린 판결은 놀랍게도 집행유예였다. 송 판사의 설명을 들어보자. “다만 피고인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며, 피해자와 합의한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이같이 형을 정했다.” 그러니까 ‘다만’은 롤러코스터를 방불케 하는 아찔한 반전을 가능케 하는 단어였다. 제주도에 가면 마트 맞은편에서 택시를 기다리지 말자.

또 다른 사례. 대구의 시내버스에 탄 A군(18·남)은 옆에 선 B씨(62·여)가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는 이유로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B씨는 해당 사건으로 얼굴, 머리, 어깨 등에 심각한 부상을 입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합병증으로 끝내 숨졌다. 당시 폭행을 만류하던 C씨(22)도 A군의 구타로 전치 2주 진단을 받았는데, 재판부의 판결은 이번에도 집행유예였다. “죄질이 나쁜 데다 유족이 상당한 정신적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여 피고인의 죄책이 절대 가볍지 않다. 다만 아직 10대에 불과한 피고인이 전과가 없고 초범인 점, 비기질성 정신병적 장애상태에서 범행한 점, 유족이나 피해자와 합의한 점 등을 고려했다.” 대구에서 시내버스를 타는 분들은 가급적이면 숨을 부드럽게 쉬자. A군이 옆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사법부를 ‘다만’에만 의존하는 집단으로 보는 건 그들을 무시하는 행위다. 이씨(39·남)의 경우를 보자. 그는 지난해 7월, 집에서 여자친구 ㄱ씨(47)를 마구 때려 숨지게 한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당시 ㄱ씨는 이씨에게 주먹으로 얼굴 등을 수차례 맞아 의식을 잃고 쓰러진 뒤 병원으로 옮겨졌고, 결국 숨졌다. 재판부는 고심했을 것이다. 사람을 죽인 범죄에 집행유예를 선고하면 누가 납득하겠는가? 그래서 재판부는 우리에게 친숙한 ‘그러나’를 등장시킨다. ‘앞의 내용과 뒤의 내용이 상반될 때 쓰는 접속 부사’인 ‘그러나’는 전혀 이어질 수 없을 것 같은 문장을 부드럽게 연결시켜 준다. “피해자의 고통, 유족들의 처참한 심정, 여자친구를 가격해 사망에 이르게 한 점 등을 고려하면 죄질이 매우 좋지 않다. 그러나 피고인이 피해자에게 다른 남자가 생긴 사실을 확인하고자 다그치는 과정에서 벌어진 우발적인 범행으로 보인다. … 고심 끝에 피고인이 정상적인 사회구성원으로 돌아갈 기회를 주기로 했다.” 여기서 ‘그러나’를 쓰니까 집행유예란 판결이 좀 더 이해가 가지 않는가? 그전처럼 ‘다만’을 썼다면 여론의 역풍이 만만치 않았으리라.

다음 사례에도 ‘그러나’가 등장한다. 최씨(66·남)는 잠든 아내의 머리를 둔기로 수차례 내리쳐 살해하려 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유인즉슨 자신의 외도 사실을 안 아내가 밥을 차려주지 않았기 때문인데, 물론 이 판결에도 집행유예가 나왔다. “피고인이 자신을 피해 도망치는 아내를 쫓아가 머리를 계속 때리는 등 범행 방법이 무자비하고, 이 때문에 다친 피해자가 피를 많이 흘려 사망할 위험도 컸다. 그러나 범행이 다행히 미수에 그쳤고, 피해자가 입은 상처도 치료돼 현재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다.”

여기서 ‘그러나’는 피해자의 빠른 회복력과 더불어 이 판결을 이해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다.

지금도 사법부는 많은 범죄자들을 사회로 돌려보내고 있는 중이다. 여기엔 ‘다만’과 ‘그러나’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데, 글쓰기 책을 냈던 사람으로서 그들에게 ‘다만’과 ‘그러나’의 올바른 용법을 가르쳐 드린다. “사법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 다만 그 국민이 선량하게 살아가는 보통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그러나 사법부는 여전히 자신들이 국민들을 위한다고 믿는다. 국민 여론과 배치된 판결이 계속 나오는 이유다.”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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