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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이었던 지난 10월27일, 서울 혜화역에 남성들이 집결했다. ‘당신의 가족과 당신의 삶을 지키기 위하여’(이하 당당위)가 주최한 이 모임은 소위 곰탕집 성추행 판결을 규탄하기 위해 기획됐다. 곰탕집에서 일어난 성추행 가해자에게 징역 6월의 실형을 선고된 것에 항의하는 차원으로, 여성의 말만 듣고 유죄판결을 내린 이 판결이 남성들의 삶에 위협이 된다는 게 당당위의 주장이었다. 실제로 곰탕집 가해자의 부인이 남편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글을 올렸을 때, 인터넷은 이에 동조하는 남성들의 글로 도배됐다. 수많은 남성들이 ‘이러다간 무서워서 밖에도 못 나가겠다’며 울분을 터뜨렸는데, 이는 청와대 청원으로 이어져 31만명의 동의를 받기까지 했다. 사정이 이렇다면 당당위의 집회는 전국에서 몰려든 남성들로 미어터져야 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하지만 막상 집회에 나온 남성들의 수는 60여명에 불과했다. 많은 이들이 이 숫자에 놀랐다. 청원에 동의한 사람들의 1%만 나왔어도 이렇게 민망한 수준은 아닐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갑자기 날씨가 추워져서” “남자들이 경제활동을 많이 하니까” “원래 처음엔 사람이 없다” 등등의 변명을 하는 이도 있었지만, 이전에 혜화역을 점거했던 불법촬영 규탄 시위와 비교하면 설득력이 없다. 참고로 불법촬영 규탄 시위는 5월에 열린 첫 집회에서도 1만명을 동원했고, 더위가 한창이던 8월4일에는 무려 7만명이 모이기까지 했다. 당당위는 12월8일에 2차 집회를 열겠다고 했다가 11월24일로 일정을 앞당겼는데, 이는 연말에 참여율이 떨어질까 걱정했기 때문이란다. 그렇다고 해서 2차 집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일 것 같지 않은 이유는 그들에게 ‘절실함’이 결여돼 있기 때문이다. 저 사람이 당하는 일이 자칫하면 내 일이 될 수도 있다고 여길 때, 그리고 국가와 사회가 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할 거라고 생각할 때 사람들은 거리로 나선다. 삼복더위에도 여성들이 불법촬영 규탄 시위에 참여한 이유다. 하지만 남성들 중 성추행 가해자가 될까봐 불안해하며 사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조만간 성추행을 저지를 야심이 있는 이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은 착실하게 일상을 영위하리라. 그렇게 본다면 인터넷에 표출됐던 뭇 남성들의 분노는 방구석에서 여혐을 시전하며 스트레스를 푸는 행위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남성들의 이런 행태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건 5년 전 있었던, 남성연대 대표 성재기의 죽음에서도 드러난다. 여혐이 이슈화되기 시작했던 2008년, 성재기는 온라인에 남성연대를 만든다. 우리 사회에서 남성이 차별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가족부라는 게 존재해 더 큰 차별을 만들어낸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여가부가 폐지되면 우리는 막걸리 한잔 하고 흩어질 겁니다. 여가부가 사라지면 우리나라 남녀는 모두 사랑하며 함께 살아가게 될 겁니다.” 그의 주장에 동조하는 남성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남성들의 많은 수가 경제활동을 하고, 여성에 비해 임금도 많이 받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남성연대가 돈 걱정할 일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남성연대는 쭉 가난했다. 월 2000원 이상의 회비를 내는 이가 170명에 불과할 정도였는데, 이는 사무실 운영비조차 충당하지 못하는 액수였다. 설립한 지 5년이 지났을 무렵 그의 부채는 2억원으로 불어났다. 자금난에 시달리던 성재기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는데, 그건 바로 한강에 투신하는 퍼포먼스였다. “이제 저는 한강으로 투신하려 합니다. 남성연대에 마지막 기회를 주십사 희망합니다. … 시민 여러분들의 십시일반으로 저희에게 1억원을 빌려주십시오.” 한마디로 남성연대의 진정성을 알아달라는 뜻. 그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인명구조 자격증 소지자를 한강에 대기시킨 걸 보면 진짜로 죽을 마음은 없었던 것 같다. 안타깝게도 퍼포먼스는 성재기의 생각처럼 진행되지 않았다. 성재기는 불어난 물살에 떠내려갔고, 필사적인 수색 끝에 사흘 뒤에야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다.

성재기를 죽게 만든 원인은 뭘까? 무모한 퍼포먼스가 가장 큰 이유지만, 그가 그런 행동을 벌이도록 만든 건 바로 남성들이었다. 인터넷에서만 소리 높여 남성 역차별을 외치는 대신 단돈 얼마라도 남성연대에 후원했다면 그가 한강에 뛰어드는 일은 없었으리라. 수많은 여성단체들이 여성들, 그리고 그 이념에 동조하는 일부 남성들의 후원으로 잘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남성이 정말로 역차별당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던 모양이다. 더 어이없었던 건 성재기의 죽음 후 남성들이 보인 행태였다. 최소한의 양식이 있다면 남성연대에 후원금이 폭주해야 마땅하건만, 그들은 여가부 홈페이지로 몰려가 무차별 공격을 퍼부은 끝에 결국 홈페이지를 다운시켰다. 번지수를 잘못 찾은 화풀이의 예로 이보다 더 적합한 게 있을까? 이후 남성연대는 양성평등연대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이 글을 쓰는 김에 링크를 타고 가보려 했지만 ‘이 페이지에 연결할 수 없음’이란 안내문만 뜬다. 이쯤 되면 인정해야 한다. 남성 역차별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런 말을 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여성들의 입을 막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걸. 우리 정부가 여성의 말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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