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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 시대는 단시간에 대량생산을 해야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속도와 양이 성공의 열쇠였다. 교육도 그랬다. 1990년대 80만명에 이른 응시인원이 올해 50만명으로 줄었다. 그러나 수능 문항 출제방식은 여전히 대량생산과 속도만 중시하던 산업화 시대를 못 벗어났다. 다섯 개 항목 중 하나를 고르는 방식으론 창의력과 비판력을 기를 수 없다. 수업도 정답 고르기만 가르친다. 수능에 응시하지 않는 수업 시간은 의미가 없어진 지 오래다. 이런 교육에 희망이 있는가.

생명과학Ⅱ 20번 문항에 유전 분야 세계적 석학도 놀라움을 표했다. 수능은 우리 학생들에게 이런 문제를 풀라고 요구한다. 대견스럽게도 학생들이 결함을 발견해 이의를 제기하자 평가원은 “문항 조건이 완전하지 않더라도 교육과정 학업 성취 기준을 변별하기 위한 평가 문항으로서의 타당성은 유지된다고 판단했다”며 심각한 문제를 드러냈다. 평가원에 재직 중인 연구자가 속한 학회는 물론이고 학연을 중심으로 평가원 입장만 대변하는 의견 수렴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법원의 판단을 보자. “일부 수험생들은 충분한 논리성·합리성을 가진 풀이 방법을 수립해 문제 해결을 시도했고, 그 과정에서 문제 자체의 오류로 인해 정답을 선택할 수 없게 됐다.” “그러한 오류는 수험생들로 하여금 정답항의 선택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적어도 심각한 장애를 줄 정도에 이른다. 따라서 이 사건 문제는 대학 교육에 필요한 수험생들의 수학 능력을 측정하기 위한 기본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없으므로, 평가지표로서의 유효성을 상실했다.” 당황스럽게도 재판부가 출제진보다 공교육 걱정을 더 했다. “수능시험을 준비하면서 사고력과 창의성을 발휘해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에 초점을 두지 않고 출제자가 의도한 특정 풀이 방법을 찾는 것에만 초점을 두게 될 우려도 있다.” 이쯤 되면 평가원은 문을 닫아야 한다. 평가원은 대학에 입학해 공부할 자격을 갖추었는가만 평가하면 된다. 말 그대로 대입 수학능력시험이다.

과거에도 수능 시험 출제 오류가 발생할 때마다 점검하고 다짐했다. 평가원장이 사퇴하며 책임을 졌다. 학연으로 얽힌 평가원 연구진 구성과 출제위원 선정 등등. 이번 생명과학 출제진 내부의 문제 제기가 없었는지 점검해야 한다. 출제진과 검토진조차 문제 제기가 없었다면 출제진 구성에 심각한 결함이 분명하다. 만일 출제진과 검토진에서 짚었던 사항이라면 더욱 심각한 구조적 문제다. 그러나 근본적 문제는 수능 문항이 갖는 한계가 분명하다는 사실이다. 핵심은 교육과정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현행 2015 교육과정뿐만 아니라 개정 작업 중인 2022 교육과정도 서술형과 논술형 평가를 전제로 한다. 그것이 미래형 교육과정에 부합한다.

엄밀하게 말해 학생 선발은 대학이 고민할 문제이다. 평가원이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 공정한 입시를 위해 정시를 확대해야 한다면 서술형과 논술형 출제방식이 옳다. 그렇지 않다면 수시가 공정해야 한다. 수시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선 서류와 면접 평가는 기록과 영상으로 증거자료를 남겨야 한다. 이의 제기가 있을 땐 제3의 입시 공정성 기구에서 검증하는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 정보공개도 대폭 확대해야 한다.

전경원 | 경기도 교육정책자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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