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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늦은 저녁에 버스를 탔다. 가야 할 곳이 낯설 줄 알았는데 한 달에 한 번씩 버스로 오갔던 길 중간쯤이었다. 그런 지 몇 년째이니 더러 버스 창 너머로 봤을 게다. 아무래도 무심히.


가전 판매장 앞 한쪽에 사람들이 모여 앉았다. 노래가 울려 퍼졌다. 목적지에 왔건만 금방, 너무 가까이서 사람들을 보게 되니 발걸음이 주춤했다. 그 앞으로 지나거나 옆에 끼어 앉을 용기가 없었다. 몸을 돌려 횡단보도를 건넜다. 사람들 위로 깃발이 보인다. ‘전국금속노동조합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영등포분회’.


신문과 인터넷 기사를 통해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의 죽음을 들은 지 벌써 오래다. 장례식장이든 집회장이든, 마음만 가봐야지 하면서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얼마 전 아는 사람들에게 이 죽음을 말하자, 한 사람이 두 눈 벌겋게 한참 울었다. 다른 이들도 마음으로 울었다. 남편들을 봐서도, 아이들이 크는 대로 일터를 찾아 나설 자신들을 봐서도 남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니, 같은 사람이기에 울었다. 온전히 ‘노동’을 인정받고, ‘사람’이 모욕당하지 않으며 일하는 게 이 땅에서 과연 가능할까. 당연해야 할 게 왜 그리 어려운 일일까.


삼성전자서비스 협력노조 출범 (출처 :경향DB)


“당신들이 월급 40루피로 나의 육신과 영혼을 샀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입니다. 나는 당신네들이 몇 년 동안 나에게 책정해 놓은 그 보잘것없는 40루피를 받는 노예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굶어 죽는 것이 나와 내 가족을 위해 훨씬 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당신네들끼리는 몫을 잘 나눠 가지면서 왜 우리는 조금도 생각해주지 않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인도 작가가 쓴 단편소설 <월급 45루피>에 나오는 벤카트 라오처럼 저런 사직서를 날마다 가슴에 쓰는 누군가도 있을 게다. 일하느라, 딸에게 ‘살면서 느끼는 소박한 즐거움’조차 누리게 해주지 못한 아빠는 딸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정시에 퇴근하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과장에게 당당히 내민 저 사직서도 ‘생계’ 앞에서 슬그머니 거둬들였다. 선심 쓰듯 과장은 월급 5루피 인상을 회사에 얘기해뒀다고 했다.


관리자의 선심이 아니라, 노동자의 권리로 열악한 노동조건을 바꾸고자 노조를 만든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은 노조를 만든 뒤 고난이 크다. 얼마 안 남은 11월, 밤바람 한가운데 앉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사직서가 아니라 유서를 써야 했던 동료는 어린 딸에게 부질없는 약속조차 해줄 수 없다.


그이들 앞으로 노동자들이 지나간다. 비닐로 싼 짐을 오토바이 뒷자리 가득 넘치도록 싣고 달리는 퀵서비스 노동자, 택시 노동자, 화물차 노동자. 차를 세워 물건을 꺼내 급히 달려갔다 얼른 차에 오르는 택배 노동자. 횡단보도를 건너는 여성 노동자들. 언젠가 일터에 설 학생들. 깃발과 구호는 지나는 이들 마음에 무얼 새겼을까. 다음 횡단보도 앞에서 녹색불이 여러 번 켜지는 동안 본 무수한 사람들. 대부분 노동자로 살 텐데 ‘노조’를 만들어 사는 게 퍽 힘겹고 고통받는 사회라니.


횡단보도를 건넜다. 판매장 유리문에는 4대 조사기관 고객만족도 1위라 적힌 냉장고 광고지가 가득 붙었다. 일하는 노동자 만족도도 1위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께, 16년을 쓴 세탁기를 더는 고칠 수 없어 바꾸기 전까지 몇 차례 뒷수리를 받아 그 수명을 늘려 썼다. 그때 수리해준 분들마다 마지막에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전화가 오면 잘 좀 부탁한다는 말에 내가 참 미안했다.


그렇게 노동자를 평가하는 전화나 문자를 받는 일이 많았다. 은행 업무 뒤에도, 휴대전화 문제로 상담을 해도 여지없다. 그때마다 나는 매우 만족을 말하거나 눌렀다. 수화기 저쪽에서든, 눈앞에서든 일하는 이들 모두 최선을 다했다. 다들 고객을 위해 애쓰는데 기업은 그런 노동자를 만족시키기보다는 쥐어짜 ‘부’를 이룬 건 아닌지.


세계인권선언 23조에서는 “모든 노동자는 자신과 그 가족이 인간적으로 존엄을 지키고 살아갈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정당하고 유리한 보수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한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그것에 가입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노동자가 이 권리와 존엄을 인정받지 못한다면, 고객만족은 기만이다.


앞으로 한 달에 한 번 버스로 이 길을 지날 때면 나는 고개 들어 여길 볼 게다. 아무래도 유심히.


박수정 | 르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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