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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사회학자 마이크 새비지는 도시를 “정치과정과 사회 갈등이 흔적을 남긴 물리적 고증물”이라고 정의했다. 권력을 ‘공간을 지배하는 힘’이라 한다면, 현대의 도시 공간은 공시적(共時的)으로는 정치권력·자본권력·종교권력·시민권력들이 서로 다투는 현장이며, 통시적(通時的)으로는 특정 장소를 지배했던 권력의 상징물들이 퇴적된 역사지층(歷史地層)이다. 현대의 도시 공간은 건설과 파괴가 끊임없이 교차하는 공간이며, 이런 행위는 항상 상당한 정치적 긴장과 사회적 갈등을 초래한다.


오늘날 도시민들 사이의 집단적 대립을 유발하는 가장 큰 사회적 이슈는 개발, 재개발, 신축, 철거 등의 행위다. 또 국가 차원에서든 지자체 단위에서든, 권력을 쥔 사람은 흔히 대규모 토목 건설 사업으로 자신만의 특별한 치적을 드러내고자 하는데, 이 역시 ‘차별화’라는 명목으로 그 이전 권력과 대립한다. 그래서 현대 도시 공간을 채우고 있는 구조물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기보다는 팽팽한 긴장 관계, 때로는 적대적 관계까지 맺는다. 다원적 권력이 지배하는 현대 도시의 경관은 그 자체로 정치적·사회적 갈등과 대립, 타협의 산물이다. 한 공간 안에서 여러 차례의 권력 이동을 경험한 역사 도시의 경우에는 여기에 ‘과거와 과거의 대립’이라는 또 다른 문제가 추가된다.


1995년 구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를 둘러싼 논란의 와중에서, 필자는 개인적으로 상당한 곤혹감을 느꼈다. 일제가 조선총독부 청사를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지은 것은,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왜소화하고 그를 총독 정치와 직관적으로 대비시키려는 정치적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그것은 조선의 수도로 조영된 서울의 ‘정체성’을 왜곡하는 행위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조선총독부 청사도 역사의 일부가 되었고, 그렇게 뒤틀린 정체성이 서울의 새 정체성이 되었다. 당시 철거 찬성론자들은 일제가 왜곡한 서울의 정체성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반대론자들은 그런 행위 자체가 일종의 역사 왜곡이라고 맞섰다. 게다가 아무리 잘 복원한다 해도 모형일 수밖에 없는 건물들을 짓기 위해 문화재 가치가 있는 건물을 허무는 것은 반문화적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구 조선 총독부 철거로 모습을 드러낸 경복궁 근정문과 근정전(1996년)/서울시 종로구 세종로(출처 :경향DB)


그로부터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 광화문광장의 분위기를 지배하는 것은 경복궁이다. 조선총독부 청사 건물이 그대로 있었다면, 광화문 주변은 물론 인근 삼청동이나 통인동의 모습도 분명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다. 요컨대 특정 장소에서 맺어진 ‘과거와 과거의 대립 관계’를 처리하는 방식이 그 장소의 미래상을 결정한다. ‘과거와 과거 사이의 대립’을 해소하는 문제는 많은 역사 도시들에 심각한 고민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오래된 것들을 모두 보존하는 도시는 생명력을 잃은 ‘화석 도시’이지 역사를 자원으로 삼아 새 문화를 만들어내는 역사 도시라고는 할 수 없다.


2009년 이대 동대문병원이 갑자기 사라진 것을 보았을 때,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때와 비슷한 곤혹감을 느꼈다. 1892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병원인 보구여관(保救女館)의 분원으로 문을 연 이래 120년 가까이 한 자리를 지켜온 유서 깊은 병원이 철거된 것은 분명 일대 사건이었다. 당시 서울시는 ‘디자인 서울’이라는 기치 아래 국제적 명소가 된 동대문 주변의 경관 개선을 역점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필자가 곤혹스러웠던 것은 동대문 주변의 전통 경관 회복과 한국 최초 여성병원의 장소성 유지 사이에 경중을 따지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때는 이 문제를 둘러싸고 별다른 논란이 없었다.


최근 보구여관 분원인 볼드윈시약소의 병설 예배당으로 출발한 동대문교회 철거 문제가 새삼 논란이 되고 있다. 철거 반대론의 핵심은 한양도성을 유네스코 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120년 된 교회를 허무는 것은 반문화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옛 건물은 1970년대에 교회 스스로 허물었고, 성벽을 타고 앉은 한옥 건물은 여러 차례의 증·개축으로 원형을 확인하기 어려운 상태다. 남은 것은 ‘장소의 역사성’뿐인데 그나마 동대문병원 철거로 인해 태반이 손상돼 버렸다. 누대에 걸쳐 그 교회에 다닌 신도들의 안타까움에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이제는 동대문과 성벽 사이의 시각적 연결성을 회복하는 쪽이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다만 그 ‘장소의 역사성’을 신도들만의 것에서 공공의 것으로 전환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따로 세심한 배려가 있어야 할 것이다.


전우용 |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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