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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출판인쇄사를 다닐 때였습니다. 어느 날 사장실에서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디자인 단가를 올려야 할지 말지 판단한다고 건당 작업시간을 1시간 단위로 체크해 제출하랍니다. 잡다한 건들을 동시에 처리하는 디자인부로서는 이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린가 한동안 손 놓고 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건 1분, 어떤 건 몇 날, 이거 했다 저거 했다 다중작업을 하는데 어떻게 작업한 시간을 낱낱이 옳게 집계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30여명이 막차 시간 애태우며 엑셀에 1,1,1,1, 어림짐작으로 제출하니 숫자가 안 맞는다고 다음날 다시!, 그다음 날 또 다시! 해서 그럴듯한 1들로 조작해 내느라 1주일 넘게 야근을 해야 했습니다. 결국엔 봐도 모르겠다, 단가 올리지 마라 흐지부지 끝났고, 그 1 때문에 일 못한 걸 메꾸느라 다시 또 지탄과 자탄의 야근 나날에 퇴사자도 속출했지요.
그 상황은 오래전 우스개와 꼭 닮았습니다. 죽고 다치면서 대군을 이끌고 천신만고 알프스산맥을 넘는데 정상까지 오른 나폴레옹이 사방을 둘러보고 그럽니다. “어? 이 산이 아닌가 봐.” 그다음 말은 뻔합니다. “야야, 도로 내려가.”
속담에 ‘눈 먼 머리가 몸통을 벼랑으로 이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두머리가 어리석으면 모두에게 해가 된다는 뜻입니다. 요즘 속담처럼 ‘못난 제왕은 재앙’입니다. 시키면 다 되고 밀어붙여서 안 되는 게 없다 믿어서일까요? 사장실에는 그 뜻 아닌 ‘궁즉통(窮卽通)’ 액자가 자랑스레 걸려 있었습니다.
되든 안 되든 일단 해보고 얘기하라 호통 일색인 사람은 우두머리 자격이 없습니다. 리더란 길도 아닌 데서 ‘뚫어라, 궁즉통!’ 외치는 돌격대장이 아니라 최적의 루트에 정통한 길잡이이자 노련한 키잡이여야 합니다. 리더는 일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길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김승용 |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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