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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과 체육대회를 할 때면 늘 고사를 먼저 지냈습니다. 고사에 빼놓을 수 없는 게 역시 돼지머리입니다. 입이 귀에 걸린 놈으로 사 와 콧구멍 귓구멍에 지폐 꽂고 고사 잘 지냈습니다(요즘은 혐오감 줄이고 뒤처리도 곤란치 않게 돼지저금통, 가짜 돼지머리 등으로 대신하는 추세입니다). 대회 치르는 동안 뒤풀이 조는 솥에 돼지머리 넣고 한 번 더 삶습니다. 끓는 물 밖으로 귀가 비죽 솟아서 숟가락 나눠 쥐고 뜨거운 김 참으며 꾹 누르고 있자니 시골 출신 선배가 그럽니다. “야야, 놔둬. 귀는 저절로 익어.” 아! 그렇게 하나 배웠습니다. 뱀에게 물려도 끄떡없는 두꺼운 비곗살이라도 귀는 얇으니 덜 잠겼다고 덜 익진 않을 테죠.

속담에 ‘머리를 삶으면 귀까지 익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핵심을 먼저 처리하면 부수적인 건 저절로 해결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속담 역시 숨겨진 맥락이 있습니다. ‘머리’를 조직의 ‘윗대가리’로 보면 ‘삶다’는 ‘구워삶다’(여러 수단을 동원해 상대를 내 생각대로 움직이게 만들다)가 됩니다. 그러면 ‘귀’는 ‘귀퉁이’ ‘끄트머리’ ‘말단’을 뜻하고 ‘익다’는 ‘안면을 트다’ ‘얼굴을 익히다’가 됩니다. 다시 말해 윗선을 구워삶으면 그 라인에 딸린 하급자들과도 쉽게 안면을 익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형님아우 하는 ‘빽’이나 돈다발 들이밀 ‘뒷구멍’만 있으면 일 번거롭게 할 거 없이 일사천리로 처리할 수 있는 법이지요.

급하다고 아무리 우는소리 해도 실무자가 안 된다고, 법규가 그렇다고, 절차가 있고 순서가 있다며 우직하거나 융통성 없이 뻗대면 보통 사람은 마냥 기다리며 동동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럴 때 “큰일을 먼저 보라, 그럼 작은 일은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비웃으며 구린 돈과 지린 접대로 ‘하이패스’하는 놈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돼지머리 썰 때는 꼭 귀부터 썰립디다.

<김승용 |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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