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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동계올림픽을 전환점으로 해서 급격하게 움직이는 한반도와 주변국의 모습을 나름대로 분석하는 해외언론의 기사나 평론을 읽다보면 적지 않은 변화를 느끼게 된다. 우선 김정은 국무위원장 이름 앞에 상투적으로 붙었던 ‘독재자’ 대신에 ‘실권자’나 ‘최고권력자’라는 호칭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한 예다. 김 위원장이 남북, 북·미 정상회담에 앞서 전격적으로 중국을 방문하고 세계정치 무대에 등장하는 모습을 보고 독일의 대표적인 보수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너 차이퉁’조차도 ‘노련한 전략가’라는 제목을 단 기사를 내보냈다. 이러한 변화는 일촉즉발의 위기에 빠진 한반도를 평창을 매개로 해서 남북 정상이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에 기인한다.

고대 그리스어에서 ‘상징(symbolon)’은 ‘악마(diabolos)’의 반대말이다. 전자는 ‘함께 섞다’ 또는 ‘함께 만들다’는 뜻이다. 친구나 연인이 헤어질 때 반지를 반으로 나누어 지녔다가 후에 만났을 때 이를 서로 비교해보는 관습에서 유래했다. 후자는 ‘이간질하다’ 또는 ‘비방하다’는 뜻으로 ‘요한계시록’에서 큰 용, 늙은 뱀이나 사탄으로 묘사된 ‘악마’다. 이런 의미에서 평창은 한반도에 화해와 평화를 가져오는 상징과 갈등·증오를 부추기는 악마와의 싸움이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한반도의 운명을 누가 주도하고 있는가를 둘러싸고 아직도 설왕설래한다. 문재인 대통령의 ‘운전자론’에 대해 비판자들은 운전대를 김 위원장에게 이미 넘겨주었다고 힐난한다. 그러나 전쟁 위기의 문턱 앞에서 가까스로 평화로 향한 실낱같은 희망을 살려내는 일을 남북 정상 가운데 어느 한쪽의 공적으로만 돌릴 수 없다. ‘2인3각’ 달리기처럼 어느 한쪽이 지나치게 빠르거나, 아니면 너무 더디어도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도중에 같이 넘어질 공산이 크다.

판문점에서 열리는 이번 남북정상회담은 2000년과 2007년에 있었던 정상회담과는 성격이 상당히 다르다. 이번 회담은 앞으로 열리게 될 북·미 정상회담과 함께 한반도의 지속가능한 평화체제의 구축을 가능케 할지, 아니면 실패해서 이전보다 더 심한 위기를 몰고 올지를 가르는 중대한 사건이다. 따라서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려는 과욕을 부리지 말고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먼저 분명하게 구별해야 한다. 과욕은 항상 자기중심적인 논리에 갇혀 있다. 너를 나와 똑같은 존재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고 마음을 놓을 수 있다는 강박감은 남과 북이 하나로 되는 데 필요한 ‘과정’을 잊게 만든다. 남북 사회는 분단 70여년을 지나면서 같아 보이지만 변했고, 다르게 보이지만 같은 점을 많이 공유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통일을 쉽게 체념하거나, 아니면 저절로 굴러올 대박처럼 여기게 된다. 그래서 “같다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을 녹여서 다 똑같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辨同於異者非銷異爲同也)”라는 원효의 ‘화쟁(和諍)’사상을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과거 분단 독일에서도 1970년 3·5월과 1981년, 세 번에 걸친 정상회담이 있었다. 동서냉전이 아직 한창이던 시기였기에 동·서독 정상은 당장 큰 성과를 기대하기보다는 분단의 고통을 서로 덜 수 있는 일부터 시작했다. 독일 통일은 유럽 통일이기에 거시적 안목 속에서 통일을 준비해야 한다며 1958년 당시 서베를린 시장이었던 브란트는 “같이 속했던 것은 언젠가는 하나가 될 것”이라는 희망을 표명했다. 이로부터 31년이 지난 1989년 11월9일 저녁,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감격적인 순간을 맞은 그는 이 말을 다시 되새기며 통일된 독일의 책무를 강조했다.

물론 당시 독일과 현재 한반도의 상황은 다르다. 그러나 이번 정상회담이 북핵 문제의 우선적인 해결에만 과도하게 매달려 남북이 이미 일정한 경험을 축적했고, 현 상황에서도 곧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군사적 긴장완화, 사회경제 그리고 문화적 교류, 이산가족 문제와 같은 과제를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한반도의 비핵화 문제는 남쪽의 안보상황과 연관되어 있지만 동시에 미국은 말할 것도 없이 주변국가의 이해관계와도 아주 복잡하게 얽혀 있다. 따라서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지나치면 부족함만 못하다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지혜가 새삼스럽게 요구된다.

제재와 압박을 계속 가하면 머지않아 북이 스스로 핵무장력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판단과 북·미관계의 정상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여전히 평행선을 그리고 있다. 이런 상황을 이번 정상회담이 획기적으로 혁파하는 만남이 되리라는 기대는 물론 크다. 그러나 기대와 현실 간의 거리는 아직도 멀다. 따라서 판문점 정상회담은 무엇보다도 한반도에 지속가능한 평화체제를 중장기적으로 정착시킬 수 있는, 안전한 항법(航法)에 대해 기본적인 합의를 도출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이런 접근은 백기투항 직전의 김정은 체제에 기사회생의 기회를 주어 나중에 더 큰 재앙을 불러온다는 주장이 있다. 군사적인 충돌과 전쟁의 그림자까지 어른거렸던 평창 이전의 상황을 지금 다시 되돌아볼 때 남북 간에 대화와 협상 이외에 다른 해결책이 있을 수 없음은 분명하다. 이와 관련해 “모든 전쟁은 결국 협상으로 끝난다. 그런데 왜 처음부터 협상하지 않는가”라는 네루의 영감을 주는 질문을 나는 떠올리게 된다.

정상회담은 기본적으로 정상 간에 인간적인 신뢰를 쌓고 정치적 결단의 진정성을 서로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문 대통령을 이창호의 신중한 바둑, 김 위원장을 유창혁의 화려한 바둑에 비유한 흥미있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니체도 <탈도덕적 의미의 진실과 거짓>이라는 유고(遺稿)에서 소나기 속에서도 가면을 벗지 않는 ‘이성적’ 인간과 ‘즐거워하는 영웅’으로 ‘직관적’ 인간을 대비했다. 문 대통령이 전자에, 김 위원장이 후자에 가깝다는 생각을 나도 해본 적이 있다.

그러나 원효는 “정에도, 또 이치에 있어서도 서로 바라보며 어긋나지 않는다(於情於理相望不違)”는 중용의 미덕을 지닐 수 있는 인간을 강조했다. 민감한 주제로 인해서 이견과 갈등도 있겠지만 따뜻한 정(情)과 예리한 이(理)의 조화 속에서 남북 정상이 회담을 성과적으로 마무리하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65년 전 휴전협정의 조인장이었던 판문점이 화쟁의 상징으로서 우리 겨레를 하루라도 빨리 평화협정을 넘어 통일까지 인도할 수 있기를 멀리서 기원한다.

<송두율 |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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