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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15일, 일본이 패망하고 한국이 해방되었으나 일본인들은 바로 한국 땅을 떠나지 않았고, 그들이 이 땅에 제 마음대로 붙여놓은 이름들도 바로 바뀌지 않았다. 해방 후 1년 동안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이 만든 땅 이름을 그대로 부르며 살았다. 서울의 이름은 여전히 경성부였고, 가로명들은 여전히 본정, 명치정, 황금정, 죽첨정 등이었다. 서울의 간선도로변에는 메이지상점, 고카네 잡화점, 다케조에 철물점이라 쓰인 간판들이 늘어서 있었다. 대형 건물 정문에 내걸렸던 일장기들이 사라지기는 했으나, 서울은 일본의 식민지 도시다운 면모를 버리지 못했다.
일본 식민 통치자들이 제멋대로 바꿔놓은 지명(地名)만이라도 원래대로 되돌리자는 여론이 형성된 것은 해방 후 반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1946년 8월15일에야 미 군정청은 수도의 명칭을 경성부에서 서울특별시로 바꾸었다. 이 직후 서울시 산하에 가로명제정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위원회는 먼저 일본인들이 바꿔놓은 이름은 가급적 옛 이름으로 되돌리되, 주요 간선도로에는 한국의 위인들 묘호(廟號)나 시호(諡號), 이름을 붙인다는 원칙을 세웠다. 새 동명과 가로명이 고시된 것은 10월1일이었다. 조선시대에 경복궁 전로(前路), 황토현길 등으로 불렸고 일제강점기에는 광화문통이라는 공식 명칭을 얻었던 군정청 중앙청사 앞길에는 세종로(世宗路)라는 이름이 붙었다. 조선 개국 이래 정치의 중심 무대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니, 우리 역사상 가장 훌륭한 정치를 펼쳤던 성군(聖君)의 묘호를 붙여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한 사람은 없었다. 그때부터 지금껏 세종대로는 서울의 중심 가로이자 대한민국의 ‘국가 상징 가로’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1960년 4·19의거로 이승만이 하야하자, 곧바로 이승만 초상 일색인 지폐 도안을 바꿔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한국은행은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이 여론에 대응했다. 제2공화국 출범 두 달 만인 그해 8월, 세종대왕 초상을 넣은 1000환권 새 지폐가 발행되었다. 세종의 어진(御眞)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상상화를 그릴 수밖에 없었으나,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을 참칭한 이승만을 빼버리면, 그 자리는 당연히 세종의 것이 되어야 했다. 이후 2009년 5만원권 지폐가 새로 발행될 때까지, 세종은 한국 최고액권 화폐의 주인공 자리를 지켰다.
1967년, 서울 거리 곳곳에 애국선열들의 동상을 세워 국민 교육의 자료로 삼자는 취지하에 당대의 실세 김종필 주도로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가 결성됐다.
위원회가 처음 세우기로 결정한 동상은 세종과 이순신이었다. 위원회의 애초 구상은 세종 동상은 세종로에, 충무공 동상은 충무로에, 을지문덕 동상은 을지로에 세운다는 것이었으나, 군사정권의 ‘정신사적 정통성’을 강조하려 한 박정희의 뜻에 따라 세종의 자리는 충무공 차지가 되었다. 그로부터 40여년이 지나 세종대로 한복판에는 세종대왕 동상이 섰다.
해방 이후 현재까지 한국인들은 지폐 도안으로, 길 이름으로, 동상으로, 기념관으로, 위인전으로, 기념일로, 그 밖의 기념물들로 세종을 기린다. 중국에서는 신화시대의 요순우탕(堯舜禹湯)이 성군(聖君)이지만, 한국에서는 15세기 실존 인물 세종이 유일한 성군이다. 세종 전에 성군 없고 세종 뒤에 성군 없다. 세종을 기리고 추모하는 정도로 치자면, 세종의 후손들이 다스렸던 조선시대보다 현대가 더하다. 한국의 현대는 세종의 시대다.
그런데 현대의 한국인들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세종을 추모하고, 그의 치적(治積)을 기리며, 그와 같은 통치자가 다시 나오길 바라면서도 막상 그의 치세(治世)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세종 개인이 걸출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지만, 그의 치세를 만든 원동력은 민본주의 정치 철학과 ‘우문정치(右文政治·학문을 숭상하는 정치)’ 시스템이었다. 세종은 만 21세에 왕위에 오르자마자 집현전을 확대하고 세상의 모든 학문을 연구하게 했다. 국가적 지원에 힘입어, 그의 재위 기간 중에 조선 지식인들은 천문학, 지리학, 언어학, 의약학, 역사학, 농학, 공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에서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의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다. “나랏말씀이 중국에 달라”와 “어린 백성이 이르고자 할 바 있어도”, 즉 지적으로 자립하려는 의지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학문에 실천성을 부여했다. 세종 연간 국가가 발간한 책만 <칠정산> <팔도지리지> <동국정운> <고려사> <향약집성방> <의방유취> <농사직설> 등 온갖 분야 300여종에 달한다. 이 연구 출판 사업들을 토대로 조선은 자립적 지식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으며, 세종은 후세에 길이 기억될 빛나는 치세를 이룩할 수 있었다.
지금은 저마다 집현전의 후예를 표방하는 국책 연구기관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이들이 이룬 업적으로 후세에 전해줄 만한 것이 얼마나 되는가? 오히려 비리투성이 국책사업들을 뒷받침하는 연구 보고서나 만들어 학문적 수치를 자초하지 않았던가? 오늘날 한국 학문의 세계적 위상은 어떤가? 경제 규모에서나 군사력에서나 올림픽 순위에서나 한국은 세계 10위권 안에 있다. 그런데 학문의 순위는 어느 정도인가? 오늘날의 지식인들은 “신예와 독창으로써 세계문화의 대조류에 기여 보비(補備)”(기미독립선언서 중)하기보다는 지적 종속 상태를 즐기고 있는 것 아닌가?
올해는 세종 즉위 600년이다. 여러 기관 단체에서 세종의 업적을 기리는 축제나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으나, 중요한 것은 세종에게 제대로 배우는 것이다. 이제 지난 반세기의 학문정책을 전면 재검토하고, 한국 학문을 진정으로 발전·융성시킬 수 있는 새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전우용 |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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