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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의 첫번째 스튜어드십 코드(수탁자 책임투자)가 소득 없이 끝났다. 한진그룹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대한항공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3월 주총에서 조양호 회장이 이사 연임에 나설 경우 반대표 정도는 던질 수 있겠지만 이건 예전부터 해온 일이다. 지주회사인 한진칼에 대해선 이사 해임 규정과 관련한 정관변경을 추진키로 했는데, 이 역시 총수 일가 지분이 30%에 달하는 한진칼에서 국민연금 의도대로 정관이 변경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논의가 한창 진행되던 지난달 말 문재인 대통령까지 나서서 “스튜어드십 코드로 기업의 범법행위에 책임을 묻겠다”고 독려했지만 결과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적어도 스튜어드십 코드의 정치적 독립성에 문제가 없음이 확인됐으니 반겨야 할 일일까. 대통령과 보건복지부 장관이 연일 강경 발언을 통해 국민들의 눈높이를 올려놓은 것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결과다.

애초에 스튜어드십 코드로 기업을 응징하는 ‘정의구현’에 나서겠다는 발상부터 무리수였다. 범죄와 일탈을 일삼는 재벌들을 응징하는 것은 법의 몫이지 국민연금이 할 일은 아니다. 주식을 사고팔아 연금 재정을 늘려야 하는 국민연금에 스튜어드십 코드는 양날의 칼이다. 예컨대 가만히 있으면 주식으로 100원을 벌 수 있는 기업에 스튜어드십 코드로 경영참여에 나선다고 가정해보자. 경영참여로 회사가 나아져 100원보다 더 많은 수익을 낼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 못한다. 오히려 100원보다 더 못한 수익이 돌아올 걱정을 해야 한다. 스튜어드십 코드가 소득 없이 끝난 가장 큰 이유다.

적어도 정의구현보다는 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스튜어드십 코드 행사 이유를 찾아야 한다. 이번 사안에서 찾아야 하는 첫번째 교훈이다. 연금으로 경영참여까지 갔을 때 장기적으로 재정에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는지 객관적 자료로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는 얘기다. 대한항공 논의에 참여했던 한 수탁자책임전문위원은 “연금 기금운용본부에서 회의자료로 만들어 온 200페이지 분량 자료 중 150페이지가량이 증권사 리포트였다”고 한탄했다. 재벌 눈치를 보는 증권사 리포트가 위원들에게 제대로 된 기업분석 자료를 제공했을 리 없다. 상근직도 아닌 전문위원들이 이렇게 급조된 티가 팍팍 나는 자료를 바탕으로 경영참여에 나서자 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기금운용본부의 역량을 키워야 한다. 이번엔 왜 못했냐고 타박할 것도 없다. 연금의 기존 주식관리업무만으로도 정신없는데, 객관적인 리포트를 뚝딱 만들어내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지난해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논의 단계부터 문제제기 됐던 부분이다. 필요하다면 인력과 예산을 더 투입해서라도 보다 양질의 분석자료를 만들어 기금운용위원회와 수탁위를 지원해야 한다.

두번째 교훈은, 예상대로 ‘재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연금의 경영참여 여부 논의가 절정에 달했던 지난달 말 국민연금은 한진그룹을 만나 입장을 물었지만 빈손으로 돌아왔다. 수년째 ‘1000원 배당’으로 유명한 남양유업은 국민연금이 배당확대를 요구하자 곧바로 “싫다”고 응수했다. 총수들이 대차게 나올 수 있는 이유는 명확하다. 자신들이 지분을 틀어쥔 채 이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한 스튜어드십 코드로 뭘 하든 별 힘이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튜어드십 코드 하나 갖고는 안된다. 재벌을 감시하고 견제하고 처벌하는 법을 더 만들어야 한다. 국회에 1년 넘게 잠들어 있는 상법 개정안이 대표적이다. 역시 국회에 제출된 상태인 공정거래법 개정안도 과연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등 시민단체들은 개정안이 현 정부의 ‘공정경제’를 실현하기엔 턱없이 함량미달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공정거래법 개정안 작업을 주도한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국내 몇 안되는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의 ‘적극적인’ 찬성론자다.

<송진식 정책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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