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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한·일 월드컵 직전에 일본 축구 대표팀의 간판 선수였던 나카타 히데토시에게 일본의 한 우익 신문 기자가 이런 질문을 했다. 일본 대표팀 평가전 성적이 좋지 않은데, 그 이유가 일본 선수들에게는 애국심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당신은 기미가요를 부르지 않는데, 다음 평가전에 당신이 기미가요를 부르면 선수들과 관중들이 감동을 받아 축구의 신이 경기장에 강림할 것이다. 기미가요를 부를 텐가? 나카타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기미가요, 너무 장엄해서 축구하기 전에 부를 만한 노래는 아니죠.” 실제로 그는 기미가요를 부르지 않았고, 그날 평가전에서 유일하게 기미가요를 크게 따라 부른 선수는 브라질에서 귀화한 산토스였다.

한국의 축구 대표팀은 경기 전 애국가가 나오면 모두 가슴에 손을 얹고 따라 부른다. 군 복무 중인 선수들은 거수경례로 태극기를 향한다. 조국을 대표해서 경기장에 나서는 선수들은 국가의 운명을 짊어진 전사들이다. 특히 한·일전에 나설 때 선수들의 마음은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다. 일본에만큼은 질 수 없다는 정신력은 적어도 역대 일본전의 압도적인 승리의 원동력인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투혼은 아마도 우리의 스포츠 내셔널리즘을 압축하는 언어일 것이다.

국가대표 선수들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방송 인터뷰를 할 때, 대부분의 선수들은 “지금까지 저를 성원해주신 국민 여러분께 감사합니다”로 시작한다. 간혹 국가에서 지원한 태릉선수촌에서 맘 놓고 운동한 것이 금메달을 따게 된 큰 힘이라고 힘주어 말하기도 한다. 과거 사회주의국가에 있었던, 전 세계에서 거의 유일한 국가대표 선수들의 합숙 훈련소인 태릉선수촌은 한국형 스포츠 내셔널리즘의 생산기지였다.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을 준비하는 선수들은 태릉선수촌에서 합숙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생각한다. 태릉선수촌은 현재 진천으로 이전했지만, 조국이 나를 호명한 것을 인증하는 장소이자, 금메달 꿈을 펼칠 수 있는 꿈의 성지였던 셈이다.

그러나 조국이 부른 태릉선수촌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세상과 격리돼 성폭력과 반인권적 폭행의 비밀장소가 되었다. 쇼트트랙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심석희 선수는 조재범 코치로부터 상습적인 폭행과 성폭력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그녀가 성폭행을 당한 장소로 지목한 곳이 바로 태릉과 진천 선수촌, 한국체육대 빙상장 라커룸이다. 국가대표 선수들이 합숙하는 장소는 외부와 격리돼 일반인들은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모른다. 코치들은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을 빌미로 체벌과 폭행을 정당화한다. 이게 다 너희들 금메달 따게 하려는 것이고, 국위선양을 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문을 건다. 협회는 코치들의 만행을 알면서도 금메달이란 지상과제를 위해 묵인한다. 금메달과 국위선양은 선수들의 인권 위에 군림한다. 심석희 선수에게 금메달은 개인의 값진 영광이 아니라 강압과 폭력의 대가로 얻은 국가의 전리품이었던 것이다. 심석희 선수의 폭로와 고발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시민단체에서 기자회견을 하니, 빙상 체육인들은 다음 올림픽에 금메달 못 따면, 너희들이 책임질 거냐고 겁박을 한다. 금메달로 최종 수렴되는 스포츠 내셔널리즘은 코치와 협회가 폭력을 조장하고 공모하게 만드는 어둠의 속이다.

스포츠 내셔널리즘은 조국 근대화가 만들어낸 괴물이다. 가난한 시절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려는 국가 이데올로기는 스포츠를 통해 대중들을 단결시킨다. 베트남 국민들의 최근 축구 열풍도 그 신화에 해당된다. 그런데 스포츠 내셔널리즘은 대중의 광기와 폭력을 동원해 목표를 달성하고자 한다. 정당한 것은 과정이 아니라 결과이다. 그것은 선수들의 인권을 짓밟고, 폭력을 정당화시키는 보이지 않는 공포의 주술이다. 제2의 심석희 선수 사태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이 괴물 같은 스포츠 내셔널리즘을 내파해야 한다. 대표선수들이 합숙하는 선수촌을 해산시키고, 선수 코치들에게 인권교육을 실시하며,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살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해주는, 이른바 “금메달이 아니어도 괜찮아, 너희들만 행복하면” 프로젝트를 가동해야 한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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