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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 | 고려대 명예교수·경향시민대학장



 

스필버그의 영화 <링컨>은 한 위대한 미국 대통령을 과거로부터 불러내어 오늘의 시점에서 그의 행적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여러 제도를 미국으로부터 가져왔기 때문에 제퍼슨이나 매디슨 같은 건국 1세대 지도자들로부터 배울 수 있다. 최근에는 복지국가와 노동문제가 한국 정치의 중심 이슈로 부상했기 때문에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에 관심을 가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링컨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정치가일까. 노예제 폐지를 둘러싼 갈등이라는 배경이 우리의 직접적인 관심사가 되기는 어렵다. 그런 의문을 가질 법도 한데, 스필버그의 링컨은 우리가 링컨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에 좋은 대답을 주었다. 그것은 우리가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데 필요한 훌륭한 리더십의 모델이 아닐까 한다.


영화의 원작인 도리스 컨스 굿윈의 <팀 오브 라이벌스>(국내판 ‘권력의 조건’)는 영화로 만들어지기 전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이 책에서 영감을 얻어 그의 민주당 대선 경쟁자였던 힐러리 클린턴을 국무장관으로 발탁했다고 해서 이미 유명해진 바 있다. 링컨은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패배했던 다른 세 명을 모두 국무, 재무, 법무라는 핵심부서 장관으로 불러들일 정도로 용기 있고, 개방적이고, 포섭적인 리더십을 보여 준 바 있다. ‘스필버그의 링컨’을 가장 돋보이게 하는 점은, 링컨을 신비화 혹은 위인화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보다는 높은 도덕적 비전을 갖고 있지만 그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행위조차 불사하는 사람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1865년 1월의 어느 날, 전장에서 존경하는 대통령과 대면할 기회를 가졌던 흑인 병사가 1863년 11월에 있었던 게티즈버그 연설 내용을 암송하는 것으로 시작해 1865년 3월 두 번째 취임 연설을 하는 것으로 종결된다. 이 짧은 시간 구도 속에서 영화의 초점은 노예제 폐지를 명문화한 수정헌법 13조를 하원에서 통과시키는 입법 과정에 두어진다. 그렇지만 이 입법 과정의 배경이자 맥락은 어디까지나 전쟁 상황이었고, 수많은 사건들이 폭주했던 복합적인 국면이었다. 노예제의 찬성이냐 반대냐 하는 것, 말하자면 도덕적 대의를 둘러싼 문제 사이의 선택이라면 오히려 쉽고 단순했을지 모른다. 


1863년 링컨 게티즈버그 연설 (경향신문DB)


그러나 내전이 끝날 시점에서 즉각적인 평화와 노예제 종언은 상호 배타적인 선택지가 되고 말았다. 진행 중인 평화협상을 성사시켜 조기에 종전을 이룬다면 많은 인명 피해를 줄일 수 있겠지만, 정작 전쟁의 목적이었던 노예제 폐지는 불분명해질 수 있었다. 아니면 종전 협상을 지연시키더라도 노예제 폐지를 고수할 것인가. 이 모든 것은 전쟁지휘자의 고독한 결단의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최선의 선택은 전쟁을 빨리 종결하여 인명피해를 줄이면서 노예제를 폐지하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노예제 폐지를 너무 밀어붙이면 야당인 민주당은 물론 자신의 정당인 공화당 온건파로부터 반발을 불러오고, 그럴 경우 노예제 폐지를 위한 조치들은 실패로 돌아갈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링컨의 사려 깊음은 노예해방에 대한 최소정의적(minimalist) 접근, 즉 흑인 노예에 대한 ‘법적 평등’으로 목표 설정을 조정하는 데 있었다. 온건한 목표 설정은 그가 추구하는 연방의 유지라는 또 다른 목표와 충돌하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수정 헌법 통과에 필요한 하원의원 재적 3분의 2를 확보하기 위해 제일 먼저 설득과 포섭의 대상이 되는 그룹은, 자신의 정당인 공화당 내 강경파였다. 흑인 노예에게 투표권을 포함해 모든 권리를 일시에 부여해야 한다는 강경파(maximalist)의 목소리가 커질 때, 보수파와 부동표의 반발을 불러올 것임은 당연한 이치이다. 가장 어려운 문제의 하나는,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을 어떻게 믿도록 할 것이냐 하는 설득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들에 대한 진심어린 설득과 동시에 링컨은 의석을 곧 잃게 될 레임덕 민주당 의원들을 상대로 공직이라는 미끼와 돈으로 매수하고, 반대자들을 협박하고 포섭해 나가는, 부도덕한 수단들도 서슴지 않는다. 


영화의 구도를 게티즈버그 연설과 재임 취임사 사이에 설정한 것은 그의 리더십의 발전적 전개를 보여 주기 위한 치밀한 기획으로 보인다. 게티즈버그 연설은, 죽음으로서 대의에 헌신한 전사자들을 칭송하는 자리에서 민주주의의 도덕적 이상과 대의를 다시 한번 천명하는 내용이었다. 재임 취임사는 전쟁이 종결되는 시점에서 스스로 전쟁을 평가하고, 종전 처리와 전후 복구 방향을 천명하는 자리였다.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특히 패전한 남부연합주들에 엄격한 전후 처리를 요구하는 공화당 강경파에 반하여 링컨은, 전쟁의 참화를 가져온 한쪽 당사자로서 책임을 인정하고, 사랑과 포용으로 전쟁의 상처를 함께 복구해 나가자고 호소한다. 전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공화국의 분열 위기를 온건한 전후 복구정책으로 대응했던 링컨이 남부 분리주의를 옹호하는 한 급진파 청년에게 암살된 것은 커다란 아이러니이자 정치의 비극성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게티즈버그 연설과 재임 취임사를 짝을 이루게 한 영화의 구도는, 마키아벨리적 문제의식을 볼 수 있게 한다. 그것은 권력의 문제와 관련해 성격이 아주 다른 두 측면에 대한 것인데, 하나는 ‘더러운 손’의 문제이다. 즉, 정치 영역에서 행위자가 목적 의지 내지 대의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아무리 정의로운 것이라 하더라도 부도덕한 수단의 사용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스필버그의 링컨은 이 측면을 명징하게 드러내 보인다. 다른 하나는, 영화를 통해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좀 더 큰 문제인데, 권력의 극단적 형태로서 폭력에 대한 것이다. 전쟁이 극단적 폭력의 전형적인 형태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대표적인 진보파 정치철학자의 한 사람인 셸던 월린은 마키아벨리적 문제의 핵심을 ‘폭력의 경제학’이라고 정의한다. 정치의 본질은 권력이고 권력의 핵심을 폭력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폭력을 부정하고 회피할 것이 아니라, 이를 적극적으로 대면해 폭력을 가장 경제적이고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작은 폭력으로 더 큰 폭력을 저지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아마 더 도덕적일 것이다.


그러나 대의는 폭력의 사용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마키아벨리에게서는 해결되지 않는 질문으로 남는다. 링컨이 직면하는 노예제 폐지와 공화국의 통합이라는 문제는, 전쟁이라는 수단을 통하지 않고서는 성취할 수 없는 대의였음을 게티즈버그 연설은 상징한다. 반면 재임 취임사는 전쟁을 효과적으로 제어하고, 전쟁이 아니고서는 성취할 수 없었던 목적을 이제는 정의와 평화를 중심으로 한 온화한 방법으로 성취하겠다는 것을 강조한다. 어느 면으로 보든, 스필버그의 링컨은 마키아벨리적인 측면을 부각시킴으로써 그를 새롭게 해석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통해서든 아니면 실제로든, 링컨을 마키아벨리주의자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 차라리 링컨은, 정치인의 소명을 내면적 신념의 윤리와 현실 속에서 그 행위가 만들어 내는 결과에 책임지는 책임의 윤리를 동시에 강조했던 막스 베버의 정치 윤리론에 더 가까울 것 같다. 링컨은 캘빈주의와 미국 북동부 산업자본주의의 발전을 사회경제적 기반으로 한 ‘양키-휘그당’ 전통에 기초한 도덕적 이상에 헌신했고, 그러한 이상은 노예제와 양립할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졌다. 그에 따라 반노예제 휘그당의 대변자 역할을 일관되게 수행했다. 그는 도덕적 열망과 함께 강렬한 정치적 야망을 가졌지만 동시에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적 타협과 온건함, 그리고 사려 깊음을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실천했다. 도덕적 이상과 현실정치를 결합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 주면서, 그 양자를 결합하는 이상에 가장 가까이 갔던, 드물게 보는 정치인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자 깊은 감동을 떨쳐버리기 어렵게 만드는 두 번째 취임 연설을 뒤로하고 극장 문을 나서면서, 한 위대한 정치지도자를 주제로 한 영화를 통해 귀중한 정치교육 소재를 제공해 준 스필버그에게 마음속 깊이 찬사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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