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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문화와 삶

시로운 생각

opinionX 2022. 6. 16. 10:18

카페에 앉아 있던 한 사람이 지루하다고 말한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다른 한 사람이 늘어지게 하품을 한다. “우리는 왜 매번 지루할까?” 한 사람이 묻자 하품을 마친 다른 한 사람이 따분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매번은 아니야, 자주 그럴 뿐.” “그런데 너는 지금 하품만 하고 있잖아.” 하품하던 사람이 놀랐는지 갑자기 딸꾹질하기 시작한다. 그야말로 “하품에 딸꾹질”이다. 어려운 일이 공교롭게 계속되고 있다. “움직이자!” 한 사람이 단호하게 말하며 딸꾹질하는 사람을 일으켜 세운다. 그들은 어디론가 이동한다.

바깥에 나와 걷는데 아까 들었던 말이 자꾸 들렸다. 다름 아닌 “움직이자!”라는 말이. 움직이면서 움직임을 떠올렸다. 자세나 자리를 바꾸는 것, 가지고 있던 생각을 바꾸는 것, 사실이나 현상을 다른 상태로 바꾸는 것 모두 움직이는 일이다. 움직이는 일은 기본적으로 바꾸는 행동인 셈이다. 동시에 특정 목적을 가지고 활동하는 것, 기계 따위를 가동하는 것 또한 우리는 움직인다고 말한다. 움직이는 일은 지속을 위한 행동이기도 한 것이다. 바꾸기 위해,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

몸을 움직여야만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가만있으면 누군가를 설득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 원하는 회사의 문을 두드리지 않으면 입사는 요원하다. 보고 싶은 이를 향해 이동하지 않으면 그리움은 전달되지 않는다. 반대로 마음이 움직여야 몸을 움직이기도 한다. 마음이 동하지 않는데 몸이 선뜻 나설 리 없다. 하기 싫은 일을 차일피일 미루는 것도, 마주할 상황을 끝끝내 외면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몸과 마음은 한통속이다. 그러므로 “움직이자!”라는 말은 의욕 없는 심신을 다그치는 말이다. 상태를 사태로 만들자고 독려하는 말이다.

이를 가리켜 나는 ‘시(詩)롭다’고 말하련다. 사전에는 이 단어가 ‘시리다’의 전남 방언이라고 나오지만, 내게 시로움은 익숙한 상태를 벗어나고자 하는 안간힘, 낯선 존재에 가닿으려는 적극적인 몸부림에 가깝다. 시로움이 전제되지 않은 새로움은 불가능하다. 돌이켜보니 시로 가는 길에는 늘 시로움이 있었다. 주변을 들여다볼 때 심신을 처음의 상태에 가깝게 하는 일, 먼 데를 내다볼 때 긴장을 최대한 풀고 심신을 유연하게 만드는 일 모두 시로움을 꿈꾸고 시로운 생각에 다다르는 일이다.

시로운 생각은 이로운 생각과 거리가 있다. 어떤 이익을 바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시로움은 ‘위함’이 아닌 ‘향함’에 가깝다. 달성하는 대신 성찰하고,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대신 보이지 않는 변화를 발견하는 데 관심이 있다. 지루함을 토로하는 시간에 일단 바깥으로 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누군가는 시답잖다고 여길지 모를 이런 생각을 하며 길을 걷다가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움직임이 늘 도착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문득 산책과 시 쓰기는 닮아 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다. 어떤 목적을 위해 걷거나 쓰지 않는다는 점에서, 도중에 그만두고 싶다는 욕망이 스멀스멀 올라온다는 점에서, 실제로 포기하기도 하고 별수 없이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가기도 한다는 점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통점은 의외성이다. 출발할 때 막연하게 그렸던 도착지가 실제로 당도한 곳과 다르면 어떤 전율에 휩싸인다. 시로움이 새로움을 맞닥뜨렸다는 생각도 든다. 움직였기에 비로소 닿을 수 있었던 우연이라는 점에서, 이 우연은 어느 정도는 필연적이다.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가뭄에 단비다. 옷이 젖는 줄도 모르고 한동안 제자리에 서 있었다. 비를 맞아본 적이 언제였는지 도통 기억나지 않는다. 몸을 움직이니 비도 맞는구나, 비를 맞는 감각을 몸에 다시 새길 수 있구나, 새롭지는 않아도 충분히 시롭구나. 여름비의 시원함에 흠뻑 젖은 채 집에 돌아왔다. 움직이지 않았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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