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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친구가 이사를 했다. 친구가 다니는 직장에서 이사한 집까지 걸리는 시간은 평균 50분. 출퇴근의 고통까지 감수해가며 이사를 한 이유는 그곳에 서울식물원이 있기 때문이었다. 서울에 직장을 구하고 혼자 산 지 10년 차인 내 친구는 ‘원예인’이다. 3년 전 다 죽어가는 몬스테라 화분 하나를 되살리며 자신의 재능을 발견한 후, 하나씩 들인 식물은 점점 불어나서 이제 친구의 집은 사실상 식물에게 점령당한 것처럼 보인다. 집을 식물원처럼 만든 것으로도 모자라 아예 집을 식물원 근처로 옮긴 친구의 요즘 얼굴은 10여년간 내가 봐온 친구의 어떤 표정보다도 밝다.

학교 후배는 2년 전 강원 양양으로 이사를 갔다. 디자인 회사를 다니던 후배는 재주가 많아서 주변 사람들의 생일마다 직접 만든 목공예품을 주고 가끔 집에서 만든 맥주를 모임 자리에 가져오기도 했다. 배우는 것을 좋아하고, 관계를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후배는 모두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래서 그가 ‘서핑이 너무 좋아서’ 무작정 양양으로 떠난다고 선언했을 때 모두 아쉬워했다. 싹싹한 성격답게 후배는 지난 2년간 자주 안부를 물어왔다. 나와 친구들이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던 중에 내가 눈치 없이 ‘도시가 그립지 않냐’ 질문하니 후배는 ‘가끔요!’ 하고는 절경으로 유명한 하조대의 석양사진을 보냈다. 별다른 말을 붙이진 않았지만 그가 한동안 서울로 돌아오는 일은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5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는 을지로에 갔다. 처음 그 골목에서 노동자들을 위해 노가리와 생맥주를 팔기 시작한 ‘을지OB베어’가 여섯 번의 강제 집행 끝에 철거당한 지 한 달이 되는 날이었다. 수많은 가게가 전부 ‘만선호프’의 이름을 달고 있는 골목은 사람들로 인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을지OB베어’ 강제 철거에 반대하는 연대 문화제를 위해 그 자리에 참석한 나는 사람들의 지지 발언을 듣고 공연을 보며 오랜만에 시원한 맥주를 마셨다. 피케팅을 시작하는데 내 뒤에 있던 한 여성분이 외쳤다. “이웃끼리 같이 좀 먹고 삽시다!” 그 말에 동의하는 관객들이 따라 외쳤다. 나는 지금 같이 목소리를 내는 이 사람들이 나의 이웃이 된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20대 내내 좋은 집을 구하기 위해서 발이 닳도록 걷고 뛰었다. 싼값이라면 반지하도 좋았고, 교통비를 아낄 수 있을 만큼 직장과 가깝다면 옥탑도 좋았다. 그렇게 돈을 벌어 언젠간 입주할 ‘꿈의 아파트’ 리스트를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 좋은 집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쉽게 말할 수 있었다. 교통이 편리하고 치안이 좋고 경관이 아름다운 동네에 천장이 높고 거실이 넓으며 사시사철 볕이 잘 드는 아파트라고. 이렇게 십년째 살림을 이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키운 ‘좋은 집’에 대한 선망은 그것이 곧 ‘좋은 삶’이라는 착각으로 이어졌다.

‘좋은 삶’에 대한 숙고가 결여된 ‘좋은 집 구하기’는 삶에 한계를 만든다. 부를 삶의 최우선에 둔 이들에겐 해당되지 않는 말이겠지만, 적어도 삶이 수많은 존재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것임을 아는 이들이라면 내가 살고 싶은 집을 가격, 크기, 구조가 아닌 내가 살고 싶은 삶을 근거로 구하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내가 나답게 일할 수 있는 일터가 있는 곳, 나와 내 이웃이 장애나 정체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는 곳, 환경을 위해 거주자들이 함께 뜻을 모을 수 있는 곳. 이렇게 ‘좋은 삶’에 기초해 내가 꿈꾸는 집을 구체화시키다 보면 그 집에 입주하기 위해 내가 지금부터 해야 할 일들이 그려진다.

학교나 직장 근처의 ‘그나마 괜찮은 집’을 찾아 발품을 팔던 나와 내 친구들은 이제 살고 싶은 삶을 위해 집을 구하기 시작했다. 일, 환경, 취미, 이웃 … 고려해야 할 것도, 쟁취해야 할 것도 많지만 로또 복권이나 청약에 당첨되는 확률보단 높으니 승부, 걸어볼 만하다.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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