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김형, 저는 지금 학회 참석차 경주에 와 있습니다. 공식 일정이 시작되기 전 오랫동안 수첩에 적어놓고도 하지 못했던 일을 하기 위해 새벽 일찍 일어났습니다. 바로 경주 근처 바닷가에 있는 감은사 삼층석탑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감은사를 처음 만난 것은 10년 전 한 시인의 책에서였습니다. 그 시인은 냉기 서린 감옥 시멘트벽에 감은사 석탑 사진을 붙여놓고 화두처럼 궁굴리며 참선의 날을 보냈고 덕분에 ‘얼핏 진리의 옷 한자락을 만져본 느낌’이라고 적었습니다.

새벽 동틀 무렵 아무도 없는 조용한 감은사지의 석탑은 지난 1500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거기 그렇게 서 있었습니다. 수없이 사진으로 보았지만 실물 석탑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제 입에선 “아~하” 하는 탄성이 터져나왔습니다. 단순하면서도 정제되고 힘있고 기품이 있는 석탑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저 역시 그 시인의 깨달음을 조금은 이해할 듯했습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저 든든한 지대석의 한 부분만이라도 될 수 있기를 빌었습니다. 석탑을 둘러봤지만 또 하나 할 일이 남아 있었습니다. 바로 감은사 앞바다에 있는 문무대왕릉에 가는 일입니다. 대왕암이 보이는 바닷가 모래사장에 쪼그려 앉아 용이 되었다는 문무왕을 기다렸습니다.

그를 기다리며 생각했습니다. 죽어 용이 되어서라도 나라를 지키겠다던 문무왕이 갑자기 나타나 제 나라 하나 제 힘으로 지키지 못해 전시작전권까지 다른 나라에 넘긴 이 못난 후손을 야단치면 뭐라 변명해야 하나 생각하고는 저 혼자 씁쓸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른 아침부터 바닷가에서 문무왕을 기다린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만파식적’ 때문입니다. 만파식적은 용이 된 문무왕과 김유신이 신문왕에게 전했다는 피리입니다. <삼국유사>에는 이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나고 병이 나았으며, 가뭄 땐 비가 왔다고 합니다.

경주 감은사지탑 (출처 : 경향DB)


지금 우리 사회는 연이은 대형참사로 어수선합니다. 지금이야말로 만파식적이 필요한 때가 아닌지요? 만파식적은 그저 신화일 뿐이라고 하지만, 진짜 만파식적이 있다면 저는 그것이 아마 대금이리라 생각합니다. 대금 소리를 한번쯤 들어본 사람이라면 그 소리가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지 잘 알 겁니다.

대금의 그 애끊는 소리는 갈대의 속살로 만든 ‘청’이라는 가느다란 막의 떨림이 만들어 낸다고 합니다. 그 하얗고 얇은 막은 언젠가 보았던 심장 속 판막과 닮았습니다. 아하 그렇구나! 대금 소리가 그렇게 우리 가슴을 흔드는 것은 대금의 ‘청’막과 우리네 심장의 판막이 공명하기 때문이구나. 만파식적이 만들어 내는 기적은 아마 그런 ‘공명’에서 나오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습니다.

김형, 저는 지금 전 지구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전쟁, 재난, 역질이 가져올 결말에 대해 조금 비관적입니다. 그래도 인류가 조그마한 희망이라도 만들어 내려면 무엇보다 많은 이들과 공감을 나누는 훌륭한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같은 ‘불통의 정치’로는 이 난국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에볼라 사태만 하더라도 실은 그간 가난한 이들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과 무시가 진정한 원인이며, 그러기에 위압적인 명령과 격리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저는 믿습니다.

하지만 훌륭한 지도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심장 판막이 대금의 떨림판인 ‘청’이 되어 서로 공명하는 노랫소리를 만들어 내는 일입니다. 우리가 저마다 자기 심장에 만파식적 하나씩을 품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물론 품는 것만으로는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 피리를 밤낮없이 불어야 합니다. 힘들수록 단장의 아픔으로 불어 내야 합니다. ‘미래는 오늘 우리가 부르는 노래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신영전 | 한양의대교수·사회의학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