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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칼럼

[시론]우상 파괴의 계절

opinionX 2016. 12. 13. 10:55

올가을 한국인은 참으로 위대했다. 100만, 200만명이 저마다 촛불 하나씩을 들고 몰려나와 근 두 달 동안 ‘박근혜 퇴진’을 외치고 있는 모습을 나는 프랑스 남쪽 님(Nimes)에서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거북아, 거북아/ 네 목을 내어라…”를 외쳤던 신화를 떠올리게 하였으니, 만인의 입이면 무쇠도 녹일 수 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후세의 사가들은 2016년 12월9일, 이 땅에서 일어난 일을 두고 어떻게 기록할까?

돌이켜보면, 4년 전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부터 그는 좀 이상했다. TV토론에 나와 “그래서 내가 대통령 되려고 하는 거잖아요”를 반복하는 걸 보면서, 웬만큼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심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댓글조작 의혹을 받는 국가정보원 여직원이 스스로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던 것을 두고 “사람들이 그녀를 감금했다”고 주장하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사람들은 심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청와대에 들어앉은 그는 어쩌면 지금도, 나쁜 사람들에 의해 자신이 감금돼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12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에 대한 첫 재판관 회의가 열린 헌법재판소 앞에서 경찰이 경계 근무를 서고 있다. 김창길 기자

보수와 진보를 떠나서, 언어구사력이 극히 저조해서 논리적 사유가 불가능한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는 것은 세계적인 스캔들이 될 거라고 염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급기야 그는 국제적인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가 ‘보수’이기 때문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건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물론 지켜지지는 않았지만 그가 내세웠던 공약들이라는 것이 ‘진보’와 별반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그가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 박정희의 딸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사실 ‘박정희’는 이 땅의 우상이었다. 18년 동안 장기집권을 하면서 그가 저지른 온갖 만행에 대해서는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그 18년 동안 이룩한 경제적 성과만을 내세워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퇴행적 로맨티시즘이 상당수 한국인들의 뇌리를 사로잡고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식 개발과 7·4·7 공약을 내세웠던 이명박 전 대통령은 당선되자마자, 옛날에 박정희가 그랬던 것처럼 삽을 들고 4대강을 파기 시작했다. 어떤 외신은 그런 그를 보고 “뇌 수술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사람들은 듣지 않았다. 그만큼 사람들은 박정희를 잊지 못했던 것이다.

박정희의 공과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리는 그 단세포적인 논쟁은 이제 너무나 식상하고 피곤한 것이지만, 이 땅에는 아직도 그것이 보혁 논쟁의 출발점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박근혜의 출현에 대하여 어떤 외신은 ‘독재자의 딸’이라고 비웃었지만 소용없었다. 박정희의 딸이기 때문에 그가 어떤 결함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 따위는 따지지도 않았다. 그렇게 그는 대통령이 되었다. 정말이지 절망적이고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이 땅에 거짓말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 낡은 우상을 사람들이 허물기 시작한 것이다. ‘반신반인의 그 위대한 박정희의 딸’은 알고 보니 청와대 관저에서 각종 주사나 맞으면서 최순실이라고 하는 이상한 사람의 꼭두각시 노릇을 했다는 의혹이 하나둘 사실로 밝혀지기 시작한 것이다. 비서실장 김기춘은 유신시절에 박정희 밑에서 배웠던 온갖 독재적 탄압을 오늘날 버젓이 음모했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놀랍고 끔찍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박근혜가 탄핵심판대 위에 올랐다는 것은 이 나라 사람들의 뇌리를 점령하고 있던 그 지긋지긋한 우상이 통렬하게 허물어졌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우상을 허물어야만 비로소 사람들은 보수란 무엇이며 진보란 무엇인가 하는 데 대한 차가운 사유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일지 | 소설가·동덕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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