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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의심스러운 대목은 많았다. 박근혜 대통령의 소양에 관한 얘기는 그가 정계 입문한 18년 내내 입방아에 올랐다. 박근혜는 늘 짧게 말한다. “대전은요?” “참 나쁜 대통령” “동생이 아니라면 아니다”. 간단명료하다. 처음에는 무슨 심오한 뜻이 있겠거니 했다. 알고 보니 그게 다였다. 2012년 대선 토론회에선 정책 현안을 묻는 문재인의 질문에 “그러니까 제가 대통령 하겠다는 거 아니에요”라고 했다. 2004년 한나라당 대표 시절 손석희 앵커와의 인터뷰에선 ‘경제회생론의 근거가 무엇이냐’는 질문이 계속되자 “저하고 싸움하시자는 거예요”라고 했다. 본질인 정책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박근혜가 그간 보여준 행적과 언행에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에 대한 수단과 방법은 전무했다. “대통령이 돼도 걱정”이란 말은 그래서 나왔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158회, ‘무능과 독선의 대통령’이란 비판을 받았던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도 210회 기자회견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150여회 기자회견을 했다. 박근혜는 4년 동안 5번 기자회견을 한 것이 전부다. 그나마도 질문은 받지 않았다. 토론 없는 회의, 대면보고 불가, 문답 기피는 박근혜의 실체다. 대통령 리더십은커녕 사회인의 기본 자질마저 갖추지 못했다. 그런 그가 국가 최고 지도자에 올랐다. 적어도 유권자의 절반 이상이 ‘집단 네다바이’를 당한 것이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첫째는 보수·영남·고령층에 깔린 박정희 향수다. 이들에게 박정희는 신격화됐고, 박정희의 딸도 특별한 존재였다. 박정희의 후광을 빼놓고서는 박근혜에 대한 맹목적 지지를 설명할 수 없다. 둘째는 미래 권력에 대한 기대다. 박근혜는 야당 시절에도 ‘여의도 권력’이었고 확고부동한 ‘차기 대통령’이었다. 불러주면 감읍했고, 부르지 않더라도 줄을 이었다. 셋째는 포장이다. 박근혜의 불통과 오기, 무능, 책임 회피는 철저히 감춰졌다. 모든 단점은 신비주의로 포장됐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신중하다고 했고, 어쩌다 한마디 하면 간결하고 힘 있는 메시지라고 했다. ‘식인종 시리즈’를 얘기하면 세상에 이런 재밌는 얘기는 처음 들어본다는 것처럼 배꼽을 잡고 웃었다. 영혼 없는 리액션이 세상 물정 모르는 공주를 만들었다. 비극의 전조는 있었을 테지만 외면하거나 은폐됐다.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곧바로 ‘레이저’를 맞고 나가떨어졌다. 원로그룹 7인회의 좌장 김용환조차 ‘최태민’이라는 이름을 거명했다가 그 길로 정치생명이 끝났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가결된 9일 박근혜 대통령이 위민관에서 마지막 국무위원 간담회를 주재하며 모두발언을 마치고 메모를 살펴보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전여옥은 ‘벌거벗은 임금님’을 외친 유일한 측근이다. 한나라당 대변인을 지내면서 박근혜 대표를 2년간 밀착 수행한 전여옥은 박근혜의 실체를 맨 처음 폭로했다. 전여옥에게 물어봤다.

- 보통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언행이 많았는데.

“컴퓨터로 치면 저장 용량이 이미 꽉 차 있다. 새로 타인의 삶을 보고 배우고 공감할 능력이 없다. 야당 대표 시절엔 그나마 종이에 써서 외우기라도 했다. 대통령이 돼서 다시 나의 집이었던 청와대에 들어가는 순간 내 임무를 완수했다 생각하고 손을 놔버린 것 같다.”

- 박근혜 화법을 ‘베이비 토크’라고 했다.

“사용하는 단어를 세어 보면 100단어가 안된다. 문법도 표현도 안 맞는다. ‘우리 경제가 불쌍하다’는 말은 유치원생들이 ‘꽃이 아야야 해요’라고 하는 것과 같다. 사고가 청와대 공주 수준에서 딱 멈춘 것이다.”

- 다른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몰랐나.

“왜 몰랐겠나. 다 똑똑한 사람들이다. 나보다 먼저 안 사람도 많다. 그런데 말을 안 하더라. 그게 자신에게 유리할 것이란 점을 잘 알기 때문이다.”

똑똑한 사람 넘버원인 김기춘은 “우리 대통령은 차밍(매력적)하고, 디그니티(위엄) 있고, 엘레강스(우아)하다”고 했다. 이정현은 청와대 홍보수석 시절 “자랑스러운 불통”이라고 했다. 이들뿐 아니다. 박근혜를 인우(隣友)보증 선 인사들은 도처에 깔려 있다. 지금 이들은 서로 네 잘못이 크다며 싸우고 있다. 박근혜 코미디 2막이다. 

어두운 면이 있으면 밝은 면도 있다. 박근혜가 무사히 임기를 마쳤으면 전직 대통령으로 그 위세를 계속 떨쳐갔을 것이다. 친박계도 건재했을 것이다. 선거 때마다 정치판을 휘저을 것이고, 현안마다 “좋아요” “나빠요”를 던지며 정치 영생(永生)을 누렸을 것이다.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지 않았다면 이런 꼴을 더 봤어야 할 판이다. 반면교사도 훌륭한 선생님이다. 이젠 인물을 요모조모 뜯어보는 눈도 생겼다. 지역·세대 투표도 달라질 수 있다. 천만다행이다. 그러니 박근혜에게 속았다고 속상해할 일만은 아니다.

박래용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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