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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람에서 무덤까지로 통칭되는 복지국가 영국의 기초를 제공한 베버리지 보고서를 만들도록 한 사람은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처칠 총리다. 노동부 차관이던 베버리지경(Sir Beveridge William Henry)은 1년6개월의 준비를 거쳐 1942년 전후 영국 복지제도를 설계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보고서를 주도했던 보수당은 이를 무시했고, 에틀리 당수가 이끄는 노동당은 이 제안을 중심으로 공약을 만들어 선거에서 이겼다. 공적 연금, 전 국민 의료보장, 무상교육과 아동수당 등 영국 복지제도의 골격이 이때 형성되었다.

1991년 유학 시절, 영국은 한마디로 새로운 세상이었다. 모든 병원이 공짜였고 유학생의 한 살짜리 딸에게도 우유 값으로 매달 30파운드씩 꼬박꼬박 보내주었다. 대학 등록금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비쌌지만, 영국 학생들은 오히려 돈을 받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영국의 복지제도는 정부의 이념적 구분과 무관하게 굳건히 유지되고 있다. 베버리지 보고서가 제도의 이론적 기초를 확고히 하고 세부설계까지 해놓았기 때문이다. 대처리즘이 영국을 휩쓸고 있을 때도 사회안전망으로서 복지제도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1997년 토니 블레어가 보수당 20년 집권의 아성을 무너뜨린 것도 진보정부가 질 좋은 교육과 의료를 제공하는 일을 더 잘할 수 있다는 점을 내세워 중산층의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경험은 복지국가 모델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국민적 공감을 확보하고, 확산시키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새 정부는 많은 복지정책을 발표했다. 의료보험의 보장성 확대, 노인 기초연금 인상, 치매 국가책임제, 아동수당 도입 등 모두 획기적인 내용이다. 국정운영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발표했지만, 국민적 공감대 확보 측면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 집권 5년간 공약 이행 의지를 강조한 것이겠으나, 사회안전망 확충은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제개발 속도와 성과는 기적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을 만큼 눈부셨다. 태양빛이 강렬하면 그림자도 짙은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삼성전자가 분기당 이익을 10조원 이상 내고 있지만 우리 국민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 일하는 근로자가 되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해도 자녀의 사교육비 충당하기 바쁘고, 중병에 걸리면 꼼짝없이 빈곤의 함정으로 빠지게 되는 현실이 국민들을 지치게 하고 있다. 처칠이 베버리지 보고서를 만들 때처럼 양극화로 인한 불만을 어루만지고 경제개발 과정에서 헌신한 노고를 보답해줄 필요가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경제의 생산성을 높이는 일이기도 하다. 복지시스템이 구축되어야만 노동시장의 유연성 확보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가 발전하면 나의 삶도 개선된다는 확신은 인적 자본의 질을 높이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새 정부의 복지 구상은 집권 5년간의 프로그램을 넘어 복지 백년대계(福祉 百年大計)여야 한다. 단편적으로 발표하고 추진하기보다는 현재와 같은 성장 경로와 예상 소득 수준하에서 어느 정도의 복지체계를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청사진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국민의 공감과 지지를 확보할 수 있다.

든든한 복지시스템을 갖추고 철저한 시장경제 시스템을 운영하는 유럽 국가에 견주어 보면 추가적으로 제시되어야 할 것이 많다. 실업수당의 현실화, 고교 무상교육 등 교육비 경감대책, 서민 주거 안정 노력 등이 그것이다.

임기 내 실현되기 어려운 대책까지 포함한 종합적인 설계도인 한국판 베버리지 보고서를 국민에게 보여주면 좋겠다. 후임 정부도 계속 추진하게 되면, 문재인 정부가 복지국가 원년의 틀을 다지게 되는 것이다.

재정건전성에 대한 불안이나 우려를 해소하는 일도 빠트려선 곤란하다. 정부의 정책에 동의하는 사람조차 고령화 등으로 불확실성이 크기 때문에 노후에 연금을 받을 수 있을지 걱정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프로그램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재원의 규모와 조달 방법을 추계해서 명확하게 밝히는 일이 요청되는 이유이다. 50~60년의 시계에서 우리 국민이 이를 충분히 부담할 수 있고 정부의 재정건전성도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제2의 그리스가 결코 우리의 미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기 바란다.

일찍이 베버리지경은 사회 보장을 이루는 중요한 원리 중 하나로 개개인과 국가의 협력을 제시했다. 새 정부가 국민의 공감과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복지 확충을 위해 힘찬 진군을 계속하기 바란다. 그러려면 한국판 베버리지 보고서가 필요하다.

<최광해 우리금융경영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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