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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직설

시를 읽는 이유

opinionX 2018. 2. 13. 13:48

불시에 이런 질문을 받았다. “시를 꼭 읽어야 하는 이유가 뭘까요?” 처음 만난 자리였다. “읽어야 한다는 것도 부담인데, 꼭이라는 단어까지 붙으니 의무처럼 느껴지네요.” 웃으면서 말했지만, 그 자리에 있는 내내 뭔가가 머리를 쿡쿡 찌르는 것 같았다. 어쨌든 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지 못한 것이다. 다른 소재가 등장해서 대화는 이어졌지만, 내내 기분이 찜찜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 버스 안에서 어제 구입한 시집을 펼쳤다. 김현 시인의 <입술을 열면>이었다. ‘강령회’라는 시의 한 대목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영혼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몸이 느껴질 뿐입니다.” 시를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영혼의 존재를 믿게 되었다. 움직이는 것은 몸이지만, 그 안에서 법석이며 몸에 숨을 불어넣어주는 것은 영혼이다.

아까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시를 읽는 이유에 대해 조곤조곤 이야기하고 싶었다. “시를 읽을 때, 나는 스스로를 발견해요. 나는 이런 단어에 끌리는구나, 이런 소재에 반응하는구나, 이런 문장에 마음을 내어주는구나….” 심신을 두드리는 시를 읽고 나면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깨달음이 나를 향한 찬찬한 응시로 이어지는 것이다. “내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는 늘 저 단어가 있었어요. 저 단어가 내 인생에 단단한 매듭을 만들어주었지요.”

시를 읽음으로써 타인을 이해하는 능력이 배양되기도 한다. 기형도의 ‘엄마 걱정’이라는 시가 있다. 나는 이 시를 대학수학능력시험 때 처음 접했다. 시장에 간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가 난생처음 외로움을 직면하는 시다. 모르는 작품이 나오면 으레 당황하게 되는데, 저 시는 읽는 순간 내 몸을 파고들었다. 파고든다는 것은 나도 모르게 시적 상황에 깊이 스며든다는 것이다. 시적 화자의 입장이 되어 움직인다는 것이다. 시를 읽는 일은 시적 화자가 되어봄으로써 누군가를, 누군가의 인생을 헤아려보는 기회를 마련해준다.

일상의 새로운 면, 언어의 새로운 면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2002년에 김혜순 시인의 시집 <불쌍한 사랑 기계>를 읽었다. ‘코끼리 부인의 답장’이라는 시를 읽을 때였다. “다시 또 얼마나 숨 막고 기다려야/ 앙다문 입술 밖으로 불현듯/ 불멸의 상아가 치솟게 되는지”라는 구절이 가슴에 빗금을 긋고 지나갔다. 시집을 덮고 나서도 한동안 ‘불현듯’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뱅글뱅글 맴돌았다. 불현듯의 어원이 ‘불 켠 듯’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무릎을 탁 쳤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는 늘 저 단어가 있었다. 무수한 ‘불현듯’들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여기 올 수 있었다.

‘다르게 보기’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는 점도 내가 시를 읽는 이유다. 진은영의 ‘가족’을 읽었을 때는 둔중한 것에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밖에선/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 집에만 가져가면/ 꽃들이/ 화분이// 다 죽었다”. 가족을 응시하지 않았다면, 똑같은 광경을 다르게 보려고 애쓰지 않았다면, 그것을 다르게 표현하려고 힘쓰지 않았다면 저런 시를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좋은 시는 이처럼 편견을 뒤흔든다.

매일 지나다니는 길도 자세히 살펴보면 어제와 달라져 있다. 어제까지는 없었던 벽보가 튀어나오기도 하고 매일같이 듣던 새소리에서 새로운 기척을 느끼기도 한다. 발견하려는 태도와 발견했을 때의 즐거움은 일상에 생기를 가져다준다. 익숙함 속에서 불쑥불쑥 올라오는 낯섦은,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외연뿐만 아니라 삶을 감싸는 사고의 외연도 넓혀준다. 같은 것을 보고도 전혀 다른 것을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질문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의 발견, 타인의 발견, 일상과 언어의 발견, 그리고 다르게 보기의 발견은 단숨에 사그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 질문은 가깝게는 취향에서 멀게는 세계관에 이르기까지 나를 구성하는 또 다른 자극이 된다. 질문을 던지고 일상에서 끊임없이 답을 구하며, 나는 진짜 나에게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간다.

시를 읽기 전의 나와 시를 읽고 난 후의 나는 확연히 달라져 있다. 공교롭게도 이것은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자기 자신만 안다. 자기 자신은 안다.

<오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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