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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1월, 드라마 <모래시계>는 대구에서 방송되지 않았다. 하지만 최고의 화제작을 놓칠 리 없는 비디오 대여점에서는 녹화테이프를 당당하게 유통시켰고 고등학생이었던 나도 이를 통해 작품을 접했다. 불법이지만 드라마 안에 장엄하게 펼쳐지는 ‘불법의 대한민국’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솔직히 국가권력이 개인의 역사에 어떻게 침투하는지, 그래서 우리는 이 빌어먹을 사회에 끊임없이 상식을 요구해야 한다는 묵직한 감상은 이후 나이가 들어 재방송을 보았을 때의 느낌이었고 당시에는 드라마가 나열하는 조각을 접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울렸다. 학교에는 이정재와 하나도 안 닮은 친구가 검도 목검을 들고 나타났고 나는 대구에서 정동진까지가 기차로 참으로 오래 걸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SBS 드라마 '모래시계' 고현정.
그 추억만이 이 드라마의 가치는 아니다. 나는 대학에서, 책에서, 방송에서 사회를 비판하는 주장을 하는 게 업이지만 자본의 논리에 진격하라는 우주의 기운에 마주할 때마다 스스로가 하찮게 느껴질 때가 많다. 이런 회의감에도 이 노동을 계속할 수 있는 건 <모래시계>, 그중 광주에서 1980년 5월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려준 7, 8회 덕분이다. 후배를 만나러 광주에 갔다가 얼떨결에 시민군이 된 태수는 민주주의가 삶의 언어임을 보여주고 계엄군으로 광주를 짓밟는 데 동참한 우석은 훗날 검사생활 내내 이때의 원죄의식에 힘들어하며 무엇이 정의로운지를 끊임없이 질문한다. 태수가 시위에 참여하려는 후배에게 총 든 군인을 상대할 수 없다면서 말리자 후배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말해야죠. 그 총은 우리가 세금 내서 산 총인데 국민한테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해야죠. 가만두면 그 자식들이 또 그럴 게 아니오. 요렇게 해도 된다고 할 것 아니오.” 그제야 알았다. 왜 선거에서 전라도는 김대중에게 몰표를 주는지, 왜 해태 타이거즈의 팬들이 잠실구장에서 그렇게도 김대중을 외쳤는지.
“내게 광주를 알려주는 사람이 왜 없었지?” 내가 진실을 알고 던진 질문이었다. 부모님도, 선생님도, 성당의 신부님도, 뉴스나 신문도 15년 전의 일을 말하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은 몰라서, 아는 사람은 말할 수 없어서였을 게다. 그 틈을 파고든 것은 입에도 담기 싫은 더러운 말들이었다. ‘폭도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무장을 했으니 총을 쏠 수밖에’ ‘그래도 전두환 때가 경제는 좋았잖아’ 등등. 하찮은 말들에 죄를 묻지 않으니 나쁜 대통령 9년의 시절에는 북한 개입설까지 주장이랍시고 여기저기서 등장해 여론을 어지럽혔다. 몇 년 전 5월18일에 강의 전 10초 묵념을 한 적이 있었는데 한 학생이 ‘논쟁 중인 사건을 일방적으로 가르친다’고 강의평가를 한 적도 있었다. 민주화운동을 논쟁할 수도 있는 세상에서 사회를 비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감이 들었었는데 이때도 <모래시계>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나는 드라마 한 편이 엄청난 힘을 가졌음을 경험했다. 사소한 대중매체가 내게 엄청난 사실을 알려줬듯이 사소한 나에게도 영향받을 사람이 있지 않을까? 작아도 중요한 한 조각으로서의 역할을 내가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사회를 당당하게 비판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내가 마주한 현실을 늘 의심하고 또 나 자신을 성찰하지 않고서는 좋은 역사가 만들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준 선생님이 바로 <모래시계>였다. 하지만 드라마 외에는 진실을 말하지 않았던 슬픈 15년이 있었기에 여전히 광주의 진실은 온전히 드러나지 않고 있다. 건물에 있는 총알 자국을 보고 ‘이게 총알 자국이야’라고 공식적으로 규정하는 데만 수십 년이 걸렸다. 시민을 향해 총을 쏘라고 했던 ‘누구나 다 아는’ 발포명령자는 아직도 확인되지 않았다. 모두가 <모래시계>처럼 사람에게 다가가 국가가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해야지만 진실은 규명될 것이다.
<오찬호 |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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