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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시작되고 며칠 뒤 갑자기 무릎이 아파왔다. 통증 때문에 걷기 힘들었고 계단에서는 한 발씩 옮겨야만 했다. 무릎 아픈 건 실은 오랜 지병이다. 테니스를 좋아해 과하게 운동했던 탓인지 18년 전 처음 탈이 났고, 고만고만하다 나빠지더니 결국 이 지경까지 왔다. 한번 망가지면 고치기 힘드니 부디 아껴 쓰라는 의사선생님 말씀을 귓전으로 흘리고 함부로 쓴 결과다. 

돌이켜보니 내가 병을 키웠다. 재작년엔 무릎 안 좋은 사람이 허벅지 근육을 키우겠다며 8층까지 매일 계단을 걸어 올라갔고, 작년엔 다이어트를 한다며 날마다 1만보 이상을 일부러 걸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 내 몸 전체를 보지 않고 부분에 집착했던 어리석음이 키운 병이다. 수술이든 물리적 치료든 전문가에게 맡겨 고쳐야 할 일이지만, 내가 스스로 병을 키우는 짓은 다시는 하지 말아야겠다.

내 몸을 고치고 되살리는 일처럼 우리 마을과 도시를 재생하는 일도 다르지 않다. 병을 고치려면 근원을 건드려야 한다. 병이 생긴 원인을 알아내고 병을 키우는 짓을 그만두어야 한다. 내가 내 무릎에 몹쓸 짓을 하듯 삶터의 병을 우리가 키우지 않았는지 성찰해야 한다. 재생시대에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들은 대부분 개발시대 후유증들이다. 재생에 앞서 개발시대를 돌이켜보고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깨달아야 한다. 오랜 개발시대를 살아오면서 우리 몸과 마음에 깊이 스며 있는 ‘개발병’을 알고 고쳐야 재생도 성공할 수 있다.

개발병은 ‘빨리빨리’ ‘한꺼번에’ ‘우선 당장’으로 요약된다. 빨리빨리 도시를 짓기 위해 일사불란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했다. 국가가 계획하면 지방은 군말 없이 따랐고 민주주의나 분권은 중시되지 않았다. 집이든 공장이든 한 채 한 채 짓는 대신 한꺼번에 ‘단지’로 개발했고 뉴타운이나 신도시처럼 새 도시도 뚝딱 만들어냈다. 긴 안목으로 지속 가능성을 생각하기보다 당장 눈앞의 성과를 내기 위해 ‘성장거점’을 키웠다. 국토를 고루 키우는 대신 대도시와 대기업을 집중 육성했다. 성장거점 전략은 자녀교육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아들딸 모두를 공부시킬 형편이 못되니 될 놈, 클 놈을 골라 대학까지 보냈고 그렇게 큰 자식이 성공하면 남은 식구들을 먹여 살렸다.

개발시대는 대한민국에 눈부신 성취를 안겨줬다. 경제발전과 도시화를 이루어낸 속도는 세계사에 유례가 없을 만큼 독보적이었다. 오죽했으면 폭발하듯 성장했다고 했을까. 그러나 바로 그 속도에 문제가 있었다. 성장속도는 너무 빨라도 문제이기 때문이다. 개발병을 치유하려면 국가의 전략부터 국민들 마음까지 전부 바꾸어야 한다. 마을과 도시와 국토까지 우리 삶터를 더는 물건처럼 보지 말고 생명 다루듯 조심스럽게 되살려야 한다. ‘천천히’ ‘차근차근’ 그리고 ‘오래오래’ 가도록.

재생시대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가 많다. 가장 먼저 살려야 할 것은 소멸위기 지방이다. 국토면적의 11.8%에 불과한 수도권에 인구 절반이 몰려 있다. 국토를 사람 몸에 비유한다면 머리는 너무 커져 터지기 직전인데 손끝 발끝은 피가 돌지 않아 괴사직전이다. 시와 군의 3분의 1이 인구 5만이 채 안된다. 극심한 편중과 불균형이 개발시대가 물려준 유산이고 이 문제를 푸는 것이 재생시대의 핵심 과제다.

수도권과 지방을 따로 보지 말자. 국토 전체를 한 몸 생명으로 보고 두루 살려야 한다. 재생을 하겠다면서 병을 더 키우는 어리석은 일은 그만해야 한다. 인구편중을 심화시킬 수도권 신도시와 지방 혁신도시도 이제 더는 짓지 말아야 한다. 지금은 일을 벌일 때가 아니다. 아픈 곳 빈 곳을 고치고 채울 때다.

<정석 서울시립대 교수·<천천히 재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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