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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일 | 우리땅걷기 대표·문화사학자
소크라테스가 길을 걸어가는데 “어디서 왔느냐”고 어떤 사람이 물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왔다”고 말하지 않고, “세상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워즈위스를 찾아온 방문객이 하녀에게 주인의 서재를 보여 달라고 하자 하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여기가 주인님의 책을 보관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주인님의 서재는 야외입니다.”
나 역시 그와 비슷한 질문을 자주 받는다. “사무실이 어디인지요” 하고 물으면 “온 나라가 다 사무실이고 도서관이고 일터지요”라고 답한다. 그렇다. 내겐 길이 사무실이고 응접실이고 서재다. 나는 어디를 가건 쉴 때마다 마치 안방에 앉는 것처럼 길에 퍼질러 앉는다. 나와 오랜 시간 우리땅을 함께 걸어온 도반 중에 어떤 이는 쉬어도 서서 쉬기를 원한다. 앉았다가 일어날 때 몸이 더 후들거리므로 그냥 서서 쉬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앉아 쉬면서 생각을 정리한다.
걸어오면서 귀담아듣지 못한 것, 보았으나 길가 어느 곳에선가 흘려보낸 것, 나는 책장을 넘기듯 그런 생각들을 펼쳐보면서 수첩에 옮긴다. 그리고 주변을 바라본다.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면 주변의 온갖 세세한 것까지 다 눈에 들어온다. 가까이서 아주 작은 꽃들을 바라보고, 멀리서 전체적인 윤곽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 산천의 모든 풍경들이 깨알 같은 활자가 되고, 활짝 핀 꽃이었다가 한 폭의 그림이 되기도 한다. 저와 같이 생기발랄한 책이며 꽃이며 그림들을 도대체 어디에서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단 말인가? 바라보는 순간순간이 벅차오른다.
“산천을 유람하는 것은 좋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는 옛 선인들의 말처럼, 나에게는 이 땅 어디를 돌아다니건 그곳이 다 도서관이며 박물관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며 사물들이 잘 펼쳐진 한 권의 책으로 변모되는 것이다. 그것도 세상의 그 어떤 것하고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책으로 말이다.
(경향신문DB)
“보행은 가없는 도서관이다. 매번 길 위에 놓인 평범한 사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도서관, 우리가 스쳐 지나가는 장소들의 기억을 매개하는 도서관인 동시에 표지판, 폐허, 기념물 등이 베풀어주는 집단적 기억을 간직하는 도서관이다. 이렇게 볼 때 걷는 것은 여러 가지 풍경과 말들 속을 통과하는 것이다.” 다비드 르 브르통의 글이다.
나는 길을 걸으며 수천년 이어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난다. 산과 강을 지키며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살림살이와 사랑법을 들으며, 이 땅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처연한 국토의 숨결을 느낀다. 때로는 과거를 걷고 때로는 미래를 걸으며, 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고귀한 삶의 정서를 나는 이 땅에서 찾아내는 것이다. 그야말로 내가 걷는 산천이 바로 장대한 도서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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