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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 관계인 남들도 지적하지 않는데 사적으로 가까운 아버지만 왜 이렇게 저를 탓하시는 겁니까?” “사적인 관계니까 잘못을 지적하고 고치기를 바라는 거란다. 참으로 슬프구나. 세상에 가까운 사람이 없어지면 경계해줄 사람도 없게 될 거다. 내가 죽은 이후에야 너는 내 말을 알게 되겠구나.” 아들은 나가서 투덜거렸다. “늙은이가 아무것도 모르면서 맨날 하지 말라고만 한다니까?”

15세기 문인 강희맹이 자신의 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이야기 형식에 담아 우회적으로 쓴 글에 나오는 대목이다. 이야기 속의 아들이 범한 잘못은 시장의 간이 오줌통에 상습적으로 소변을 본 일이었다. 오가는 상인들이 급할 때 사용하는 시설이어서 양반의 사용은 금지되어 있었지만, 아들은 오히려 친구들에게 큰소리를 쳤다. “이런 겁쟁이들! 뭐가 두려워서 이 편리한 걸 사용 안 해? 날 봐. 맨날 쓰는데 아무 탈도 없잖아.” 아버지가 그러다가 화를 당할 것이라고 경계하자, 아들은 대꾸했다. “너무 급해서 한 번 사용해 봤는데 참 편리하더라구요. 그 뒤로 늘 사용했는데 처음에 한 마디 하던 사람들도 그냥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도 말리지 않던데요? 근데 무슨 화를 당한단 말씀입니까?”

얼마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여느 때처럼 간이 오줌통에 소변을 보던 아들의 머리를 누군가 사정없이 내리쳤다. 이윽고 여기저기서 날아든 돌에 아들은 만신창이가 되고 만다. 그 동안 아버지의 권세 때문에 어쩌지 못했던 상인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아버님 말씀이 진실이었구나! 웃음 속에 칼이 숨어 있고 노여움 속에 은혜가 담겨 있었도다. 그 말씀 다시 듣고 싶은데, 아! 이제 영영 그럴 수가 없다니!” 아들은 슬피 울며 뉘우치고 개과천선했다고 한다.

잠시의 편리함을 좇는 아들의 눈에, 그것밖에 없는 상인들의 절박함은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 탈도 없어서 전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사소한 일에서 화가 시작되었다. 아무 탈도 없는 이유를 남들은 다 알지만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면 말해주지 않는다. 공적인 대우의 이면에 숨겨진 사적 배경을 정작 자신만 모르는 것이다. 여전히 자신에게, 그리고 가까운 이에게 경계해줄 만한 이야기이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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