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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뽑은 지 30년이 됐고, ‘박근혜’는 그 여섯번째로 선택받은 대통령이다. 어디 순탄한 정권은 없었다. 임기 초 90% 넘는 지지를 받다가 떠날 때쯤에는 곤두박질친 대통령이 있었고, 퇴임 후 검찰 조사를 받은 대통령도 있었다. 몇 번의 정권을 지나다보니 주기라는 것도 있다. 취임 초 의욕적으로 정책을 추진한다. 대통령 주변 사람들이 비리로 걸려들면 정권의 도덕성이 상실돼 국정의 추가 비틀거린다. 측근들, 친·인척 이름이 나오면 국정을 이끌 힘이 쫙 빠진다. “역사는 평가해 줄 것이다. 역사로부터 평가받겠다”면서 ‘역사와의 대화’를 시도하며 무리한 정책을 추진하기도 하지만 곧장 여론의 역풍을 맞고 흐지부지된다. ‘미래 권력’ 자리를 다투는 대선 국면이 본격화하면 ‘현재 권력’은 국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짐 쌀 준비를 한다. 물론 후임 대통령이 와도 1~2년은 고생을 해야 한다.

누구는 대통령의 5년이 비슷하게 반복돼 온 것을 ‘불행한 역사’라고 한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정권 5년 동안 내세울 만한 공(功)이 있었다. 과(過)도 있었지만 반면교사가 되면서 사회가 발전해왔다. 청와대 운영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수사해온 검찰 특별수사본부 이영렬 본부장(서울중앙지검장)이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모습이 20일 서울 중구 한 전광판을 통해 생중계되고 있다. 그 뒤로 청와대가 보인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2014년 말 이른바 ‘정윤회 비선 파동’이 났을 때다. 박근혜 정부 초기 청와대에 파견됐다 나왔던 공무원 ㄱ씨의 허탈한 표정이 아직 생생하다.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우리가 실패하면서도 수십년간 쌓아온 시스템이란 게 있는데 그게 송두리째 무너졌잖아요.” ㄱ씨도 자신이 청와대에 있을 때 최순실이라는 이름을 몰랐을 것이다. 비선 실세 국정농단의 양태들이 드러난, 말도 안되는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할까. 대놓고는 말을 못할 것이다. 공무원이니까. ㄴ씨는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중앙부처 5급 사무관으로 공직을 시작했을 때, 고참으로부터 들은 “일선 공무원들은 장관을 위해, 장관은 대통령을 위해, 대통령은 국민을 바라보고 일을 한다”는 말을 가슴에 새겼다. 그래서 설령 ‘아닌 것 같은데’라고 생각되는 일도 결국은 국민을 위한 것이라고 여기고 했었다고 한다. 요즘 민심 동향 파악이 임무인 공무원들도 아예 손을 놓고 있다고 한다. 특별히 전할 민심이 없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하는 일에 5%가 지지하고, 딴소리 말고 즉각 퇴진하라는 여론이 계속 늘어 70%대에 이른 상황이니 ‘위’에다 무엇을 보고하겠는가.

그동안 대통령은 두 번 사과했다. 처음은 마지못해 한 티가 역력했다.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었다. 그래서 두번째 사과를 했지만 “내가 이러려고 ○○○이 됐나 자괴감이 든다”는 패러디를 양산했을 뿐이다. 사과의 성패는 사과하는 이의 말과 의도뿐 아니라 상대방의 관심과 태도, 즉 쌍방의 상호작용에 달려 있다. 비난받을 자신의 행동을 명확히 설명하고 그에 따른 사회규범을 수용할 뜻을 밝혀야 한다. 위기 모면에만 급급한 이런 식의 대통령 사과는 백날 해봐도 소용없는 일이다. 사람들이 들어야 하는 말이 있는데 그 얘기를 안 하기 때문이다. 말로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단계도 지났다.

평화롭게 마무리된 지난 토요일 집회는 ‘세상의 바보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이었다. 헌법을 유린당한 국민들에게 ‘헌법(대통령 권한) 수호’만 얘기하고 “대통령 관련 의혹 중에 입증된 게 하나라도 있느냐”고 머리를 들고 있다. 민심이 돌아올 가능성이 없는데, 대통령 자신도 결국은 민심에 굴복할 수밖에 없음을 알 텐데 이판사판에 다름없다. 청와대 홈페이지에 ‘오보·괴담 바로잡기’ 코너도 열었다. 가용 공적 수단을 총동원해 민심과 맞서겠다는 것인데, 기세등등했던 대통령이 초라해 보인다.

대통령은 검찰의 국정농단 사건 수사에서 ‘공범’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이번주에 받겠다던 검찰 수사를 거부하고, 자신이 선택한 특별검사로부터 수사를 받겠다고 한다. 어차피 ‘대통령 박근혜’가 아니라 ‘피의자 박근혜’로 지내야 할 시간들이다. 미래 성장동력으로 삼겠다던 문화융성과 창조경제는 ‘창조 비리’의 수단이었음이 국정농단 사태로 만천하에 드러났다. 국정에 복귀한다고 한들, 갖은 수를 써서 남은 1년3개월 임기를 채우겠다고 한들, 무엇을 하더라도 될 일도 없고 될 리도 없다. 그동안 온나라가 난장판이 될 게 뻔하다. 안보의 위기, 경제의 위기는 가중되고, 국격과 국익도 훼손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이 버티면서 이제 국회는 탄핵 절차에 돌입할 태세다. 국민들은 ‘이게 나라냐’라고 한다. ‘개인 박근혜’의 자존심은 접어두고, ‘국가’와 ‘역사’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주길 바란다. ‘대한민국 18대 대통령’으로서 국민들의 자존감을 세워줬으면 한다. 그것이 마지막 남은 ‘명예’일지도 모른다. 떠날 때는 말없이.

안홍욱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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